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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비니야 Oct 22. 2023

운동하지 않으면 먹을 자격이 없어


다이어트를 하면서 느낀 건 식단 조절 없는 운동은 곤욕스러운 노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운동하지 않더라도 적당히 먹고 자주 움직이면 체중 증가로 인한 스트레스나 살이 찔 거라는 염려를 강박적으로 느낄 필요가 없다. 그걸 알면서도 난 체중계와 먹고 싶은 음식 사이의 균형점을 유지하지 못한 채 휩쓸렸다. 후회할 걸 알면서도 먹고, 먹고 나서 자책하고, 우울 감의 파도에 휩쓸리다 자책감의 수면에 잠겼다.  

 운동은 결코 빼먹지 않았지만, 먹는 욕구를 참는 것에는 재능이 없었다. 먹고 싶은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면 사는 의미가 없었다. 오늘 소금 빵 하나를 먹기 위해 운동하고, 다음날 떡볶이에 튀김을 곁들여 먹기 위해 효과 좋은 다이어트 보조제를 섭취했다. 나비 약의 섭취를 장기적으로 이어갈 수 없게 되자 다른 방법을 간구하다 먹었던 음식을 게웠다. 자책하며 음식을 먹은 자신을 저주하거나 미친 듯이 뛰는 행위보다는 가득 차올랐던 위장을 말끔하게 비워내는 게 후련했다. 적어도 내일 체중계 위해서 괴로운 것보다는 단전까지 끌어올린 음식물을 억지로 긁어 방출하는 게 나았다. 방금 전까지는 내 입맛과 식욕을 돌게 만들던 음식이 변기 위에 퉁퉁 불은 시체처럼 떠다니는 것을 보면 불현듯 어떤 깨달음(아니 이건 현기증이 일만큼 회의주의적인 괴로움)이었다. ‘난 왜 먹는 일에 현혹된 사람처럼 몰입했을까?’ 원효대사의 해골 물과 같이 나를 유혹하던 음식의 실체는 알고 보면 변기 위에 떠다니는 저 조각들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라미의 <나는 죽는 것보다 살찌는 게 더 무서웠다>에는 폭식증이 극도로 심했던 시기의 모습과 심리를 글과 그림으로 상세하게 담아냈다. 


먹는 것은 순식간에 끝내고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간다. 소리를 숨기기 위해 샤워기를 틀고 토하기 시작한다. 먹은 것들이 역순으로 나오기 때문에 색깔로 인해 층이 달라지는데 나는 처음 먹은 것을 보기 전까지는 구토를 멈추지 못한다.
라미 <나는 죽는 것보다 살찌는 게 더 무서웠다>


신물이 올라오고 눈물이 찔끔 나며 사타구니가 저릿한 느낌이 들만큼 음식물을 게워냈던 건 두려움 탓이다. 살이 찔까 봐 무서운 마음, 살이 찌면 내가 나를 증오하게 될 거고,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상념들이 이어졌다. 저자가 갖고 있는 불안은 내가 가진 심리와 상통하는 면이 많다. 작가가 처음 다이어트를 시작하게 된 건 예뻐지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내가 만약 날씬하고 예뻤다면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였고, 이후 운동과 폭식을 지속하다 섭취한 음식물을 억지로 토하게 됐다. 이건 일종의 과격하면서도 내밀한 자기표현 방식이다. 그 과정은 남들 모르게 화장실 안 틀어둔 수돗물 사이로 은밀하게 진행되며 체중계 위의 자책은 속옷만 입고 거울 앞에 홀로 서 있는 방 안에서 일어난다. 친구나 애인, 다른 타인과 섞여 있을 때의 난 운동을 좋아하고 활기가 넘치는 사람으로 포장되지만, 혼자 있는 집에서의 난 우울하고 음침했다.  ‘하루에 세 시간이나 운동을 한다고? 넌 체력도 좋다.’라는 친구의 말에 웃으며 ‘별 수 없지 뭐. 이젠 익숙해.’라는 대답으로 쿨내를 풍기지만 실제로는 죽지 못해서 운동하는 고된 일상의 연속이었다. 운동하는 내내 난 음식에 미혹당한 자신을 있는 힘껏 저주하고 자책했다.


 자기표현은 어려운 과제였다. 타인에게 요청해야 할 일이 있으면 몇 번이나 고민하다 말할 정도로 부탁과 요구에 미숙했던 난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비슷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러나 내재되어 있는 고통과 슬픔은 참고 억제하더라도 드러난다. 억제된 감정은 자신의 외형을 바꾸고 개조하는 노력에 집착하는 쪽으로 발현됐다. 다이어트를 하여 마른 몸매를 유지하고, 얼굴이 예뻐지면 인생이 변할 거라는 근거 없는 낙관에 기대어 맞지 않는 신발에 억지로 발을 끼우듯 자신을 어그러뜨리고 하나씩 파괴해 갔다. 

다이어트에 대한 열망과 외모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던 시기를 돌아본다. 그 시간 속의 난, 외형에 집착하는 사이 정작 해결해야 할 중점적인 사안을 방치해 두었다. 원하는 방향으로 연애가 진척되지 않거나,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겪는 스트레스가 높은 시절의 더욱더 음식에 몰입했고, 먹은 뒤에 불은 몸을 수습하는 일에 몰두하느라 많은 감정과 시간을 쏟았다. 마치 그가 애정을 주지 않는 이유가 부족한 나의 외모와 통통한 몸 때문이라고 믿으면서 가학적인 운동을 일삼았다. 

만났던 남자들은 내 불안을 알게 모르게 심화시켰다. ‘네가 살이 찌면 그땐 헤어질 거야.’라고 말하거나 ‘넌 얼굴은 예쁜데 키가 진짜 아쉬워.’라는 이야기로 내면을 자극했다. 이상했던 건 그 말에 반박하거나, 기분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애초에 난 그들의 의견을 부정하지 않았으므로 화도 나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키도 작은데 몸매라도 날씬해야지.’라는 결론을 도출하여 더욱 관리에 열을 올렸다. 내가 언제까지나 아름다워지기 위해 노력해야 관계가 순탄해질 거라고 믿는 사이 나는 점점 더 연애가 괴로웠다. 애정과 사랑이 없는 관계를 매울 달콤한 것들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건 불안한 연애를 반복했던 시기의 부작용 중 하나였다. 난 망가진 모습으로는 사랑받을 수 없다고 믿었다. 사랑받기 위해 갖춰야 할 자격 조건은 왜 이리 많을까. 이런 기준 없이도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데, 내가 유지하고 있는 관계는 과연 그런 무해하고 따뜻한 형태인가를 면밀히 되돌아보았다. 텅 비어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와 같이 공허했다. 언제든 살이 찌고, 외형이 변하면 끝나거나 변할 관계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45, 47, 삐삐- 위기, 위기. 이대로 49kg 도달 시 관계 균열, 균열이 생깁니다.  50kg 돌파 시 관계 해지. 해지 예정입니다.]

이런 공포의 안내음이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공포음은 그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고부터 사라졌다. 간혹 먹었던 음식을 게워내고, 거울 속 나 자신을  혐오하게 되는 날에는 그 시기의 어두운 감각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 같다. 한번 강렬하게 각인된 몸의 기억은 시간이 오래 지나도 여전히 남아있으므로 불쑥 찾아오곤 한다. 떼인 빚을 다시 받으러 온 당당한 주인과 같이. ‘너 요즘 경계 좀 해야겠는데. 거울 속 네 모습을 봐. 그런 모습으로 뭘 할 수 있겠어?’ 서늘한 그 질문에 나는 내가 지금 어떤 상황과 감정으로 결핍을 느끼고 불안한지 헤아려본다. 문제는 도망칠수록 커지고, 직면하는 순간 그 크기가 명확히 가늠된다. 내 두려움으로 사이즈가 부푼 문제의 실체를 보면 마음은 훨씬 덜 불안하다. 먹는 행위로 감정을 은폐하려는 시도는 이제 그만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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