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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비니야 Oct 22. 2023

지금 이 상태로 충분한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은 숱하게 많지만, 그중 한 카테고리에 운동이 있는 건 꽤나 부담되는 일이다. 난 연예인처럼 치열하게 몸매 관리를 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운동을 하루쯤 빠진다고 해서 천재지변이 일어날 리 없지만 그 움직임을 포기하는 데에 엄청난 결심이 필요했다. 막상 오늘은 하지 않을 테야,라고 결심한다고 해서 마음 편히 늘어질 수 있는 배짱도 없었으므로 싫은 마음을 누르고 몸을 일으키는 게 결과적으로는 낫다고 믿었다. 땀 흘리며 운동하거나 먹는 것을 통제하며 드는 근본적인 의문은 ‘도대체 이건 누굴 위한 일인가?’였다.  운동이라는 행위가 자신을 충족시킬만한 시간이었다면, 회의적 의문이 없었을 것이며 몸에 대한 태도가 가학적으로 유지되지도 않았으리라.

대개 다이어트와 몸매에 관하여 몰두하는 건 팔 할인 여성이다. 그에 비해 남성은 자신의 몸에 대한 판단 기준이 느슨하다. 이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분석한 '식이장애 진료 현황' 자료에서도 알 수 있는 식이 장애를 앓는 환자의 10명 중 8명은 여성으로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만큼 여성에게 몸에 관한 문제는 정신적 스트레스로 다가올 만큼 중요한 화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거릿 애트 우드의 <먹을 수 있는 여자>에는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젊은 여성에게 먹는 행위가 갖고 있는 의미가 어떠한지에 대해 깊이 있게 묘사한다.  


"아무것도 못 먹겠어요. 전혀 아무것도 못 먹겠어요. 심지어 오렌지 주스도." 결국 그렇게 됐다. 그녀의 몸이 자가 차단에 돌입했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의 테두리가 점점 작아져 바깥의 모든 것을 거부하는 한 점이 되었다. 마거릿 애트 우드의 <먹을 수 있는 여자>


소설 속 주인공 메리언은 사회의 역할과 상이한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고 분열한다. 그 갈등과 혼재된 마음의 괴로움은 음식을 통해 드러난다. 때로는 미친 듯이 음식을 열망하다가도, 단 한 입도 먹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는 단순히 음식을 섭취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며 여성의 심리적 욕구와 불안의 상태를 여실히 대입하여 보여주는 상징성 짙은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저자는 사회에서 상처받거나 공평하지 못한 상황으로 인해 침해받는 여성의 괴로움과 반항심을 음식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현실감 있게 표현한 것이다. 여성은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적 시스템과 그에 따른 인권의 모독, 폭력적으로 강요되는 성역할에 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직접적으로 욕구를 드러내는 대신 음식을 통한 간접적인 상태를 드러낸다. 이는 일상에서도 자주 경험하는 일이지 않나. 음식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거나, 일시적인 만족에 기대어 우울감을 해소하려다 폭식증이 심화되기도 한다. 여성은 어떤 분야에서 일하든 외모에 대한 품평을 듣게 된다. 상품의 품질을 논하듯 그들은 여성의 몸에 관하여 긴밀히 이야기한다. 키가 어떻고, 얼굴은 어떠하며, 몸매의 어떤 부분이 아쉬운지. 여기서 드는 또 다른 의문은 어째서 여성의 몸은 존재 자체로 인정받지 못한 채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도구나 평가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가에 대한 문제다. 여성들이 직접 나서서 제 몸을 쇼윈도 위에 전시하지 않더라도 그녀들은 늘 관찰당하고, 감정받는다.

 여성의 미는 훌륭한 무기인 동시에 그 실효성을 다하면 미흡한 관리의 참변으로 평가받거나 전성기보다 못한 퇴물 취급을 받는다. 공백기를 깨고 컴백한 여배우의 외모에 대해선 온갖 품평이 난무하지만, 남성 출연진의 외모 변화는 이슈화되는 일이 거의 없다. 여배우에게 있어 못생기거나 살이 찌는 건 죄지만, 남성의 변화는 개성으로 둔갑하거나 자연스럽게 용인된다.

 과거에는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여성 정치인의 외모를 품평하는 주제를 다룬 적이 있다. 그들이 어떠한 정치적 행보를 보이는 가에 관한 문제는 관심 밖이었고, 유명 인플루언서나 연예인처럼 외적 이미지로만 소비되었다. 여성 앵커가 안경을 쓰고 뉴스를 진행하는 것이 이슈가 됐던 것만 봐도 여성의 외모는 사회적으로 매우 큰 논점 거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 앵커는 안경을 쓰면 안 된다는 규율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안경을 벗고 단정하게 화장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서야 한다는 통념적 분위기는 그간 암묵적으로 이어져 왔다.

 

 정치캐럴 메싱의 <일그러진 몸>에서는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문제에 관하여 다룬다.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처음엔 자신이 겪은 문제에 관하여 터놓는 것을 꺼린다. 그들이 입을 열지 못한 건 여성의 몸으로 겪는 차별과 부조리한 문제에 관한 언급이 과잉된 예민함으로 치부되어 비난받거나 개인적 결함과 실수로 내몰릴까 봐 두려운 마음 때문이었다. 여성 노동자 중 한 명은 말하다. ‘(남성 고객들에게) 존중받기 위해 끊임없이 치러야 하는 전쟁이 지긋지긋하다’라고. 이젠 그런 차별과 품평에 노출되는 상황이 이상하지 않게 여겨질 만큼 여성의 몸은 원치 않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고, 불쾌한 피드백까지 덤으로 얻어야만 했다. ‘전보다 살이 쪘는데.’, ‘이젠 관리할 나이도 됐잖아.’,‘화장 좀 하지 그래. 입술 색  죽어서 어디 아픈 줄 알았다고.’라는 날카로운 언어들에 노출되는 사이 여성은 자신의 실체가 ‘얼굴과 몸’으로만 평가되는 것에 자괴감을 느끼는 동시에 외적인 부분의 부족함을 만회하려는 노력을(화장이나 의상, 운동을 하며) 이어왔다. 이는 음식에 과잉된 몰두나 두려움을 야기하며 식이 장애로 심화되어 나타난다. 나 또한 그 평가 선상에 있어왔고, 음식에 열띤 집착으로 일상이 마비된 삶을 살았다.  외모를 가꾸고 체중계의 앞자리 숫자를 4로 유지하기 위한 집착적인 열망을 불태우는 노력,  그 노력 안에는 정작 ‘나 자신’이 빠져 있는 게 문제라는 것은 다이어트라는 이름의 전차가 더는 제어가 되지 않을 만큼 폭발적인 속도로 내달리는 때에야 알게 된다.


체중감량을 위한 운동 말고, 진짜 네가 하고 싶었던 운동을 해봐.



친구는 어느 날 무기력한 내게 조언한다. 난 오로지 재미와 즐거움을 위한 목적으로 ‘폴댄스’를 시작했다. 어떤 계기와 목표도 없었다. 재미없는 운동이 아닌 나를 위한 흥미로운 운동을 하고 싶었던 게 목적이었다. 폴 위에서 몸을 지탱하여 동작을 만들고 움직이는 과정은 피부의 마찰로 인한 고통을 수반했지만 보람과 즐거움을 주었다. 그 운동은 이전과 달리 다이어트나 몸매 관리를 위한 목적만으로 시작하지 않았다는 점이 긍정적인 신호였다. 운동 자체에 대한 즐거움은 ‘이 운동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체지방을 태우는 가.’라는 문제에 관한 기대 심리 없이 평온하게  이어졌다. 숨기고 싶었던 군살들을 드러내야 하는 의상에 대한 부담도 있었지만 뭐 어떤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게 아니었고, 폴을 타는 내 모습을 유심히 보며 팔뚝살과 승마살이 얼마나 두툼한지 비난하는 이는 없었다. 손아귀와 팔의 힘으로 몸을 지탱하여 동세를 만드는 것, 결코 하지 못했던 동작을 스스로 하게 되는 변화와 발전하는 과정은 분명 오롯이 나만의 즐거움이었다. 누군가의 평가와 시선에서 자유로이 놓여 움직이는 순간, 처음으로 나를 위한 운동을 하는 일이 재미있었다.

  시선의 매임이나 평가를 위한 목적으로 이어가는 행위 외에 자신만을 위한 몰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타자의 시선에 위축되어 있던 어깨를 펴고 나만을 위한 무언가를 하는 몰입의 시간은 분명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불온한 해방감을 준다. 예쁘지 않더라도, 훌륭한 몸매를 갖추지 않더라도 지금 이 상태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 여성들에게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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