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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비니야 Oct 22. 2023

처음 본 뒷모습

왜 헤어졌느냐고 친구가 물었다. 저마다 이별의 사유는 다른 듯 보이지만 사랑의 끝은 한 가지 이유로 귀결된다. 끝이 가도 없을 것만 같던 관계더라도 상대에게 투자하는 애정과 시간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돌이킬 수 없다. 연인을 위한 작은 노력과 이타심은 하지 않아도 될 무연한 행위가 돼버린다. 무심히 넘길 수 있는 것에 대한 별 것 아닌 트집이라며 비난하고 원망한다. 사소한 시비는 반복된다. 애인은 내가 과민하다 말하고, 난 그에게 변했다고 비판했다. 


“지나가는 권태 같은 건 아니야?”


친구의 말에 지난 시간이 터널 안을 통과하는 기차처럼 지나갔다.


“뒷모습.”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그런 말이 나왔다. 뉘엿뉘엿했던 속에서 구역질이 흘러나오듯 터져 나온 단어. 그 말이 가슴을 쿡 찔렀다. 무심한 연인의 행동에 마음은 콘크리트처럼 굳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한 지점은 굳지 않고 물씬하게 발에 밟혔다. 


“그 사람, 한 번도 내 뒷모습을 바라봐준 적이 없어.”

“그게 헤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야?”

“난 매일 내 애인의 뒷모습만 봤더라고.”


난 괜찮다고 믿었던 연애 관계가 끝난 것에 대해 지친 한편 후련한 얼굴로 그 시기를 담담하게 진단했다. 아직은 저릿한 아픔이 남아 있었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도 마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익숙함으로 가장하고 불편하더라도 넘겼던 사소한 일들은 분명 사랑이 아니었다. 


“집에 돌아갈 때가 되면 각자 지하철을 탔거든. 사는 방향이 달랐으니까. 난 성수역 방면, 그 사람은 오금 행 방면으로. 난 헤어질 때 아쉽고 애틋한 마음에 몇 번이나 뒤돌아 봤는데, 그때마다 내 눈에 담긴 건 애인의 뒷모습이야. 해야 할 일을 끝마치고 후련하게 퇴근하는 것처럼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어, 그 사람은.” 


난 비로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을 시인하듯 숨을 깊이 토했다.


“3년 정도 만났으면 서로 좀 편해지기도 하잖아. 마냥 애틋할 수 없지 않나.”

“여기서 다른 게 더 필요할 리가.”


의무적 연애가 갖는 권태가 드러난 지점들은 비끗 잘못 어긋나면 심각한 문제로 발전된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연애 초기인 그녀는 권태와 사랑의 변질에서 자신은 예외인 듯 남 일처럼 물었다. 내 사랑은 다를 거라고 믿는 근거 없는 확신이 느껴졌지만 모른 척했다. 믿고 싶은 대로 믿으려 애써도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해도 진심을 가장한 거짓이나 식은 애정은 티가 난다. 


“사랑이 의무가 될 순 없어. 직장이나 학교 다니듯 의미 없이 당연해진다는 건 끝난 거야. 작정하고 서로 헤어지잔 말만 안 했을 뿐.”


난 일부러 허리와 어깨를 쭉 피고 말했다. 


“헤어지기 전날, 한참 동안 애인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어. 한 번은 돌아봐줘, 먼저 등을 보이지 않으면 안 돼, 그런 생각을 텔레파시처럼 보내도 가닿지 않았나 봐. 시야에서 그 사람이 사라진 뒤에 그간에 일들이 차츰 떠올랐지.”




난 원래 그래, 애인이 늘 입에 달고 살던 말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네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광대 노릇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애인은 데이트 내내 휴대폰만 바라봤다. 오랜만에 나들이였는데, 그는 피로한 얼굴로 당장이라도 택시를 잡아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표정이었다. 불편한 애인의 안색을 모른 체 넘기며 짐짓 유쾌하게 무슨 영화를 볼지 물었다. 보고 싶은 거 봐. 너  때문에 나온 거잖아, 그날 나는 보고 싶었던 신작 영화를 봤지만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몇 차례 하품을 하거나 꾸벅꾸벅 졸던 애인은 엔딩 크레딧이 보이자마자 나보다 앞서 영화관을 나갔다. 천천히 뒤따라 나오며 애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는 두 팔을 높이 쳐들고 기지개를 켰다. 온몸으로 오늘 본 영화의 감상평을 말해주고 있었다. 네 취향은 정말 나랑 안 맞아. 이게 재미있어? 난 대답하지 않고 새것이나 다름없는 팝콘을 쓰레기통 위에 올려두고 뒤따랐다. 뒷머리를 긁던 애인의 뒷모습은 지루함과 따분함 그 자체였다. 오후 햇살에 길게 늘여놓은 모양의 그림자가 소파에 엎드려 누운 여느 때의 애인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영화는 네가 보고 싶은 거 봤으니까 점심은 내가 먹고 싶은 거 좀 먹자. 그가 나보다 한 발 앞서 걸었고, 뒤따르며 그 남자의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집 앞 편의점을 나올 때 자주 입던 회색 후드 티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 맨발에 구겨 신은 캔버스화가 눈에 들어왔다. 크록스를 질질 끌고 나오던 때보다는 구겨 신은 운동화가 낫지 않느냐고 생각하며 위안했다. 그런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하는 게 어이가 없어 쓴웃음이 흘렀다. 그는 더운 날씨에 걷는 것도 지쳤으니 모텔에 가서 배달음식을 시켜 먹자고 제안했다. 우린 침대 위에서 자장면을 먹었다. 난 반쯤 다 남겼다. 침대에 몸을 뉘인 그는 발을 까딱거리며 보고 싶은 영화를 틀고 맥주를 마셨다. 여느 때처럼 익숙한 체위의 섹스를 하고 지친 얼굴로 그가 잠들었을 때 나는 옷을 챙겨 입었다. 그가 느슨해진 눈으로 나갈 채비를 하는 나를 발견하고 어딜 가느냐고 물었다.


“그만하자. 그만하고 싶어 졌어.”


내 말에 애인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방금까지 영화 보고 밥 먹고 섹스까지 나눈 평범한 데이트의 어느 지점에서 갑작스럽게 이별의 원인을 찾을 수 있느냐고 되묻는 눈빛이었다. 난 그의 뒷모습을 보는 일에 지쳐 있었지만 터놓는다고 해서 이해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게 함부로 던지는 말들과 농담에서는 애정이 없었다. 상대를 소유했다고 단정하고 흘러온 지난 연애 기간에 쌓인 슬픔과 굴욕이 온몸에서 되살아나는 기분. 옷을 갖춰 입었는데도 벌거벗은 것처럼 목덜미가 스산했다. 그의 뒷모습만 망연히 보는 일이 쓸쓸하고 수치스러웠다.  


“방금까지 잘 즐기다 갑자기? 갑자기 이렇게 이별 통보를 한다고?”


애인은 상체를 일으키고 어이없는 얼굴로 실소를 터뜨렸다. 


“네가 보고 싶은 영화 보고 피곤한데도 나왔는데, 뭐가 문제야.”

“네 뒷모습 보는 데 지쳤어.”


난 자조적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뒷모습? 그야 내가 너보다 발걸음이 빠르니까, 그럼 네가 날 잘  따라오면 되잖아.”

“넌 나보다 늘 앞질러 갔어. 만나는 내내 내가 봤던 건 피곤한 얼굴로 빨리 집에 가자고 채근하며 앞서가던 네 뒷모습이나 섹스 후 잠든 네 등뿐이야.”


애인은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며 내 손목을 붙들고 잡아당겼다. 돌아본 그의 얼굴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그걸 이유라고 갖다 붙여 지금? 섹스까지 다 하고?”

“왜 이래, 그런 행위에 의미 부여하는 촌스러운 사람 아니잖아.”

“너 참 쉽다?”

“만나는 동안 우리가 한 건 엉겨 붙어서 섹스한 거 외에 없어.”


난 실소를 내뱉듯 말했다.


“우리 관계를 돌아봐. 너 한 번이라도 나랑 데이트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 아쉬워 한 적 있어?”

“어차피 또 볼 건데 뭐가 또 아쉬워.”


애인은 앞머리를 흐트러뜨리며 짜증 섞인 투로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짧게 느껴지고, 헤어질 땐 아쉬울 수밖에 없어. 어차피 다시 또 본다는 걸 알면서도 함께 있을 때에 충족감이 잠시라도 사라지는 건 초연해지지 않아. 적어도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마음은 그랬어. 기억 잘 안 나겠지만 연애 초반을 더듬어 생각해 봐.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도착한 버스를 몇 번이나 보내면서 정류장에서 함께 앉아 있던 때를. 우리도 그런 때가 있어.”


애인은 내 손목을 잡은 팔을 늘어뜨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매번 뜨겁고 애틋해. 벌써 몇 년째 만나는 건데.”

“난 애틋했어. 멀어지는 네 뒷모습 보는 일이 잦아져도 네가 한번 웃어주면 그 미소에 기대어 힘든 시간을 견뎠어. 근데 말이야.”


난 애인이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적어도 누군가는 내 뒷모습을 바라봐주면 좋겠어. 서로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가다가도 그 사람이 생각나서 돌아봐주는 거, 고개 돌렸을 때 그 자리에 계속해서 있다고 확인받는 거, 날 보면서 손 흔들어주는 그 얼굴. 그게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야. 적어도 좋아하면 그 사람의 얼굴이 밟혀서 걸음이 쉽게 안 떨어지는 게 당연해. 잠깐의 헤어짐도 아쉬어서 뒷모습이라도 눈에 담고 싶어 지거든.”


처음으로 내가 그 사람에게 먼저 등을 보였다. 멈춰 서거나 미련스레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든, 눈으로 내 뒷모습을 좇든 상관없었다. 사랑으로 포장하기엔 함부로 나를 방치했던 시간이 떠오르자 서러워 눈물이 났다. 그를 더 이상 못 봐서가 아니라 고개를 돌려 내 뒷모습을 바라봐주는 애정 어린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한 게 서글픈 거였다. 익숙해지면 다 그런 거라는 날조된 의견에 기대어 회피하고 모른 척 흘려보낸 시간에 대한 미련 때문에  한동안 나는 꽤 많이 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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