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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비니야 Oct 22. 2023

평범한 이별

J는 가까운 친구였다. 적어도 몇 년 전까지는 현재진행형으로 설명되는 관계였지만 햇수가 지날수록 멀어졌다. 마치 같은 극의 자석끼리 밀어내는 척력 작용이 계속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처음엔 둘 사이의 틈이 미세하여 티가 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거리감이 생기더니 손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앞질러 가버렸다. 불편함을 못 이긴 내가 먼저 거리를 둔 것인지, 나에게 흥미 요소를 잃게 된 J가 의도적으로 멀어지는 편을 택한 건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론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젠가의 기둥이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돕는 결정적인 나무 조각들이 빠져 위태로운 관계였다. 그 사실을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J의 공백은 컸다. 그런 친구더라도 곁에 두고 우정이라는 명맥을 유지하고 싶어 했던 자신에게 회의적 의문을 품었다. 솔직히 난 그녀에게 실망한 지 오래였다. J가 교제하던 연인과 결혼하게 됐다는 소식을 다른 동창에게 들은 건 얼마 전이다. 뒤늦게 단체방에 복사 붙여 넣기로 돌린 결혼 소식 메시지가 내게도 왔을 땐 아무 답도 보내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와 십여 년을 막역하게 지낸 절친한 친구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면,여러 동창들에게 보낸 것과 동일한 메시지를 그대로 붙여 넣어 전송한 건 약소한 성의조차 갖추지 못한 행동이다. 결혼할 시점에 온 연락이 달갑지 않은 건 왜일까? 필요할 때만 찾는다는 것에 대한 괘씸함? 내지는 결혼 못한 내 처지에 대한 비관과 열등감일까? 어떤 이유에서 J에 대한 실망이 생기는 걸까? 물론 그건 혼자만의 과열된 해석이거나 과민하게 신경을 쓰면서 발휘된 상상일 수 있다. 내가 여러 생각을 여러 갈래로 이어가며 자못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과 별개로 J는 결혼 준비에 여력이 없어 내게 연락할 여력이 전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어째서 그녀는 그간 내게 연락이 없었을까? 그건 아마도 우리 사이에 우정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정서적 유대감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쪽에서 노력하거나 애써서 유지되어야 하는 관계는 어떤 핑계를 가져와 덧붙여도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지금까지는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넘어갔지만 오가는 관계에서 일방적이라는 느낌이 들 때부터 관계를 더 이어가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이 점점 더 심화됐다. 아무리 바빠도 연락 한번 할 시간이 없다고? 그건 ‘부득이한 집안 사정’이나 ‘피치 못할 일정’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일 뿐 실은 그 정도 관계였던 거다.


과도한 망상이나 예민한 성미의 발동에 전적인 책임이 있다 해도 결론은 내 곁에 더 이상 J가 없다는 것이다. J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으며 ‘나이가 들수록 여자들 사이의 우정이란 쎈베이처럼 얄팍해서 부서지거나 망가지기 쉽다는 사실’에 대한 귀납적 결론 도출을 진지하게 나눌 애인도 이젠 없다. J에 대한 공백을 느끼는 건 실과 바늘처럼 엮여 있던 애인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외로운 건 싫은데, 그렇다고 다시 그들을 찾는 것도 싫어.’ 난 중얼거렸다.  정서적 유대가 만족스럽게 이어지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마저도 없으니 세상과 단절되어 혼자 버려진 느낌이었다. J와의 관계는 물에 젖은 종이에 잉크가 스며들 듯 천천히 소원해졌지만, 애인과의 이별은 남의 결혼식 뷔페 따위로 대화를 이어가다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애인은 결혼 이야기를 노골적으로 피하곤 했고 나는 보채듯 내가 원하는 답을 요구했다. 난 결혼을 하고 싶었다. 남들 다 하는 게 왜 내겐 이리도 도달하기 어렵고 버거운 건가 싶어 애인을 원망했다. 벌써 칠 년을 만났는데, 결혼이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먼저 애인의 부모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제안한 건 나였고, 그는 귀찮게 울어대는 아이의 응석에 마지못해 움직이듯 부모님과의 식사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정작 그는 나의 부모와의 만남에 대해서는 미온적인 반응이었다. 결혼 준비가 충분하게 된 뒤에 뵙는 게 좋을 것 같다며 머리를 빗어 넘기듯 쉽게 넘겨 버렸다. 과연 그가 말하는 준비라는 건 언제쯤 끝마칠 수 있는 걸까? 과연 준비를 시작한 적은 있나? 근본적이 의문이 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몇 달 전. 지인의 청첩장을 바라보며 푸념조로 난 혼자 중얼거렸다. “결정사 가입했다는 소식 들은 게 몇 달 전인데 나보다 먼저 나네. 이젠 갈 사람은 다 가고 나 혼자 남았어.” 그 말은 일종의 복선이었다. 내가 우리 둘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문제 삼고 고민한다는 무언의 신호.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애인은 게임 아이템을 새로운 유저에게 파는 일에 골몰하며 결혼식은 어디서 하는지 물었다. 왜? 결혼식 뷔페 맛있는 곳이면 같이 가려고. 어차피 넌 체면 차린다고 돈도 꽤 냈을 텐데, 나라도 가는 게 손해 덜 보는 일이지. 그나저나 음식 맛있으면 좋겠는데, 난 코스 요리보단 이것저것 골라 먹는 뷔페식이 좋아. 난 기가 찬 얼굴로 모니터로 빠져 들어갈 듯 앞으로 쏠린 애인의 불쑥 튀어나온 등을 응시하며 물었다.


“그럼 내가 부케 받아도 돼?” 

“받고 싶으면 받는 거지. 그걸 왜 물어?”


난 여과지를 거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지껄이는 애인에게 경고의 눈빛을 충분히 보냈지만 알아차리지 못했다. 애인에게 중요한 건 결혼식 뷔페의 음식 맛 따위였다. 몇 차례 동료나 친구의 결혼식을 함께 간 적이 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이젠 네 차례가 아니냐고 묻곤 했다. 그 인사말에 스트레스를 받는 건 축의금을 내도 회수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나 밖에 없었다. 내 곁에 멀거니 서 있는 애인은 멍청한 표정으로 결혼식 식순을 보거나 밥을 먹는 데 집중했다. 오래 사귄 연인을 두는 건 잠정적인 결혼 상대가 있는 것으로 공공연하게 이해되기 쉽다. 신부 측에서는 대부분 일 순위로 내게 부케를 받아줄 수 있느냐고 묻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직은 ‘이야기 중이다.’ 라거나 ‘당장은 계획이 없다.’고 말하며 머쓱하게 웃어넘기는 몇 년 사이 결혼한 동료와 친구들은 배가 남산만 하게 배가 부풀 거나, 눈도 못 뜨던 아기가 자라 걸음마를 떼고 유치원을 갔다. 굳어진 표정으로 결혼식 몇 달 전부터 피부 관리, 몸매 관리에 혈안이 되었던 동료의 고비용을 들여 변화된 몸과 반짝이는 드레스 자락을 구경만 했다. 내 곁에는 좋아하는 연어 초밥을 접시 담으며 좀 더 먹으라고 말하는 애인이 바로 보였다. 난 입맛이 없다며 국수 몇 젓가락을 뜨는 시늉만 했다. 그 이후로 다시는 애인을 결혼식장에 데려가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부케를 받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내가 굳은 표정으로 묻자 애인은 모니터를 보던 시선을 돌려 나를 봤다.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부케를 받는 것에 의미를 그제야 이해한 것이다.  불편한 의미를 간파하게 된 뒤로 애인은 말없이 모니터 화면에 집중했다. 한동안 말이 없는 둘 사이를 가르는 선풍기 바람의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난 맥 빠진 소리로 말했다. 


“너 나랑 진지하게 결혼할 생각은 있어?”

“또 그 소리야?” 


애인은 진력이 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는 나의 기분이나 고민과 상관없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키워낸 세 번째 캐릭터를 움직이고 있었다. 연애의 귀결이 꼭 결혼이어야 하는 것인지, 그 생각이 옳은 건지에 대해 애인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난 애인과 그가 키운 게임 캐릭터를 번갈아보았다. 이건 무언가 잘못됐다. 그는 나와 실제적인 미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적이 없다. 그 노력 대신 게임 캐릭터의 레벨을 높이고, 새로운 아이디를 만들어 더 희귀하고 값비싼 아이템을 사냥하는 일에만 골몰했다. 청첩장을 쥐고 있던 내 손이 떨렸다. 흥분과 열기, 그간들이 쌓여 있던 감정이 터져 나오며 온몸이 진동하듯 흔들렸다. “헤어지자.” 난 말했다. 더 이상 결혼할 마음도 없는 사람을 붙들고 프러포즈 따위를 기대하는 무용한 행위를 그만두고 싶었다. 애인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지정되어 있던 문장을 맞히면 끝나는 게임처럼 그 남자가 원하는 말을 시인한 뒤에 관계는 허무하게 끝이 났다. 


회사에서 같은 동호회 활동을 하는 과장의 결혼식은 적당한 핑계를 대고 빠지기도 애매했다. 숨 죽이고 결혼식이 진행되는 과정을 바라봤다. 애인이 바랐던 것과 달리 결혼식 음식은 코스로 나왔다. 두 사람의 서약이 있고 난 뒤 양가 부모님에게 인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박수를 짝짝 쳤다. 일부러 박수를 크게 치며 정신을 깨웠다. 입맛이 없어서 고기에는 손도 대지 않자 소스의 표면에 얇은 막이 형성되어 축 늘어진 모자처럼 얹혀 있었다. 고기에서 배어 나온 핏물과 소스가 뒤섞여 하얀 접시가 지저분했다. 축의금을 내고 비싼 호텔 음식은 먹지 않는 건 역시나 손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이번 결혼식까지는 함께 가자고 할 걸 그랬나. 연어 초밥은 아니더라도 애인이 세 번째로 좋아하는 음식은 스테이크였으니 고기라도 썰고 끝내는 편이 7년이라는 긴 연애의 대단원으로 좀 더 나은 마지막 인사가 됐을지도 모른다. 잠시 애인을 떠올렸다. 그는 어김없이 주말의 자유를 만끽하여 오후 나절이 되어서야 일어났을 것이다. 지금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 뒤에 진리의 호롱불이나 강철의 방패 따위의 아이템을 팔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자 조금도 아쉬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승하 씨가 부케 받는 거 아니었어요?”


한 테이블에 앉아 있던 팀원 중 한 명이 물었다. 난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기획 1팀의 다른 팀원은 신부의 드레스 자락을 밟지 않도록 주의하며 멀거니 서서 팔을 뻗었다. 신부가 던진 화려한 장미와 백합으로 장식된 부케가 허공에서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다음 결혼식 타자의 손에 무사히 착지했다.


“승하 씨도 갈 때 됐잖아. 애인이랑 교제한 지 꽤 됐다고 들었는데.”


쓰게 웃으며 말을 아끼는데도 궁금증을 참지 못한 팀원이 집요하게 물었다. 그녀 또한 동료의 추천으로 결혼정보회사를 가입하여 괜찮은 조건의 상대를 물색하고 있다고 들었다. 자신의 주변 동료들이 하나 둘 결혼하는 사이 차례를 놓치거나 혼자 남게 될까 봐 조급해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보였다. 애인이 있다고 해서 결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차라리 결혼정보회사에서 조건에 맞는 사람을 물색하는 편이 빠른 대안일 수 있다. 난 진심으로 그녀의 결혼에의 의지가 결실하기를 응원했다. 지난했던 긴 연애가 끝난 뒤에는 단순한 결론으로 머릿속은 말끔했다. 혼자라는 사실.  더는 보채듯 결혼을 요구할 상대가 없다는 것에 대한 감정의 질량을 측정하면 두 가지로 나뉘었다. 후회 그리고 홀가분함.

 

“헤어졌어요.”


장내를 울리는 쿨의 아로하라는 노래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 튀어나오자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러게, 말없이 넘기면 눈치를 봐서 그만 좀 묻지. 난 물색없이 질문을 던진 사원을 똑바로 보며 대답했고 그녀는 유감스럽다는 표정으로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속이 뒤틀려 있는 나의 착각인지 모르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던 내게 야트막한 위안을 느끼는 것 같았다.   희미하게 올라간 동료의 입꼬리는 내 이별을 진짜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는 느낌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연애를 꽤 오래 하더니 어쩌다가.”

“여기서 신랑 측 친구들 중에 잘 물색해 봐. 결혼할 인연은 따로 있다잖아.”


난 그럴 만한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꽃가루가 허공에서 흩어지며 조명에 반짝이며 부서져 내렸다. 눈부셨다. 현기증이 났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속이 울렁거리며 쓴 물이 올라왔다. 나 자신이 64칸으로 나뉜 보드에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기물 중 하나인 폰으로 느껴졌다. 식장을 채우는 들러리 역할은 이쯤에서 그만두고 집으로 향하고 싶었다. 손도 대지 않는 식은 고깃덩어리에 대가로 지불한 십만 원이 아깝다고 느끼며 본전을 생각하는 마음도 사라진 뒤였다. 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내를 빠져나가는 내 등 뒤로  ‘화려하진 않아도 꿈같진 않아도 너만 있어주면 돼.’라는 가사가 희미하게 울렸다.

 결혼이라는 미션 수행에 누가 더 먼저 진입하느냐를 두고 벌이는 눈치 게임에서 빠지고 싶었다. 내 차례는 언제 올지 알 수 없었고, 남들 다 가고 난 뒤에 혼자 남을 수 있다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시끄러운 속을 달래려 휴대폰을 켰다. 무심코 들어가 본 SNS에는 실시간으로 결혼식 현장의 열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축하한다는 열띤 메시지와 신랑 신부의 사 사진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친구 목록에 남아있던 J와 애인이었다. 

J는 흰색 드레스를 입고 환한 웃음을 머금은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 드레스와 비슷한 색상의 휘장이 있었고, 핑크색 알파벳 모양의 풍선으로 꾸민 ‘브라이덜 샤워’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해시태그에는 둘도 없는 친구들, 사랑해 친구들이라는 단어가 보였다. J는 해시태그에 표시된 둘도 없는 친구들에게 에워싸여 축하를 받고 있었다. 사진으로나마 J와 눈을 맞춘 건 오랜만이라 낯설었다. 그녀가 뿌린 단체 메시지에 대답하지 않은 것에 옅은 후회를 느꼈다. 답을 했더라면 나도 그녀의 브라이덜 샤워에 참석하여 비슷한 드레스를 입고 축하를 건네며 둘도 없는 친구 사이에 소속될 수 있었을까? 한때 나도 그녀들처럼 J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던 적이 있었다. 희미한 과거 기억을 헤집어보며 야릇한 섭섭함을 느꼈다. 크게 다투거나 갈등이 있었던 게 아닌데도 멀어진 관계의 균열은 어떻게 설명하거나 정의 내려야 할까.  

 후련한 이별 뒤에 친구들과 만난 애인의 근황도 여전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게임을 하는 뒷모습. 끊어진 인연들의 근황을 확인하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 몸에 꼭 맞는 트위드 원피스의 지퍼를 반쯤 풀자 한결 편하게 숨을 들이마 쉴 수 있었다. 침대에 나사가 느슨하게 풀린 목각인형처럼 힘없이 누워 있을 때 휴대폰 진동음이 들렸다. J와 함께 어울려 놀던 무리 중 한 명이었다.


“J 결혼 소식 들었지? 부케 받을 사람 찾기에 내가 너 추천했는데, 연락 왔어?”


난 오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갑작스러운 연락이 귀찮고 성가셨다. 


“네가 한다고 하면 내가 대신 전해줄까?”

“아니. 어차피 난 그날 못 가.”

“왜 무슨 일 있어?”

“지방으로 출장 가서 참석 어려워.”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그럴듯한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출장? 그래도 괜찮으면 늦게라도 참석하지. 일생에 한번뿐인 결혼식인데.”


난 상황을 봐서 연락하겠다고 말한 뒤 빠르게 통화를 끊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한 말은 ‘J에게 축하한다고 전해줘.’라는 말이었다. 

이별을 만끽할 정도로 홀가분한 기분도 아니었지만 서글프진 않는다. 관계가 서먹해졌든, 권태로운 지점에서 서로 간의 흥미를 잃어 대화가 줄어들거나 연락이 뜸해지다 멀어졌건 부자연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과거엔 내가 그들에게 둘도 없는 친구나 게임 아이템보다 재미있거나 애정이 샘솟는 존재였을 때가 있었으나 시간은 많이 흐른 뒤였다. 이별은 계획하지 않아도 예고 없이 찾아와. 졸업 같은 거지. 그 시기에 계속해서 머무는 사이가 몇이나 있겠어. 난 중얼거렸다. 고마웠어. 난 그들을 원망하거나 내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적극적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홀가분함과 공허 사이에서 서성이며 달그락 거리던 마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허무가 서서히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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