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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유리 아래의 얼굴

by 라비니야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 유리문이 내 얼굴을 두세 번 잘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유리에 비친 얼굴이 유난히 낯설었다. 눈썹 앞머리가 희미했다. 빛의 장난 같지 않았다. 몇 번이고 손끝으로 더듬었다. 손끝은 매끈한데 마음은 거칠었다. 사람은 사라지는 것을 금방 알아챈다. 나는 그쪽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영 씨, 오늘 오후 클라이언트 미팅 있죠? 보고서 오전 중에 정리해서 주세요.”
그는 언제나 정리, 마감, 정돈을 말했다. 반듯하지만 피곤한 단어들.
“네, 오전 안에 드릴게요.”

모니터 불빛에 내 얼굴이 겹쳤다. 내 표정은 늘 그랬듯 약간의 무표정과 약간의 긴장. 옆자리 소정이 말했다.
“언니, 요즘 진짜 분위기 달라졌어요. 되게 세련돼 보여요.”
“그래?”
“응. 되게 자신 있어 보여.”
자신. 큰 단어였다.
“고마워. 그냥… 좀 덜 흔들려보이려고.”
말로 먼저 믿는 날이 있다.

점심시간, 팀장이 흘깃 말했다.
“자영 씨, 요즘 이미지 좋네요. 일 잘하게 생겼어. 깔끔하고, 강해 보여.”
이미지라니. 얼굴을 이미지라고 부르는 순간, 본래 기능을 잃는다.
“그럼 다행이네요.”
맵지 않은 점심이 낯설었다.

오후 외부 미팅.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은 더 옅어 보였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는 걸까?’
젊은 디자이너가 말했다.
“이런 컨셉은 이미 나왔던 거예요.”
노력 접기 쉬운 한마디였다.
“그럼 그 컨셉을 우리 맥락에서 다르게 해보면 되겠네요.”
손끝이 떨렸다. 눈썹까지 떨리는 기분.

회사로 돌아오는 길, 유리는 잔인했다. 빛만 있으면 거울, 어둠이면 투명. 터널에 들어가자 내 얼굴은 사라졌다. 사라지는 순간이 편안했다. 보이지 않으면 덜 존재하는 것 같아서.

퇴근 후 엘리베이터 거울. 눈썹 앞머리가 더 옅어졌다. 왜 이렇게 불안할까. 눈썹이 아니라 ‘나를 믿는 얼굴’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집에서 화장을 지우고 물에 비친 얼굴을 봤다. 일그러져도 아직 나. 그때 엄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요즘은 얼굴이 좀 펴진 것 같다.”
“피곤해서 그래요.”
피곤은 만능 방패다.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 혹은 모호한 염려가 스치는 순간을 무마하는 가장 간편한 거짓말과 같은 말. 난 손 끝으로 조심스럽게 눈썹을 매만졌다. 여전히 거울 속의 내 얼굴에는 호랑이 눈썹이 남아 있었다. 다만 처음의 그것과 달랐다. 붙인 얼굴에서 지워질 얼굴로. 나는 그 사이에 서 있었다. 붙였다가, 지워지는 동안의 나. 그게 어쩌면 진짜 내 얼굴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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