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발성 메모리
어느 날, 절망이 찾아왔습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 어쩔 수 없고, 너무 처참해서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순간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찾아온다’. 였습니다.
기다린 적도 없는데, 불쑥.
40대가 되어 맞이한 절망은, 예상보다 더 깊고 질겼습니다.
20대, 30대에 겪었던 어려움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후유증도 길고, 아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잊힐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그 일들은 이미 내 뇌 어딘가, 장기기억의 서랍에 우선 저장되어 버렸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잘 ‘기억’된 것일까요?
나는 문득, “잊어버리고 싶은 것을 잊어버리는 기쁨”을 누리고 싶어 졌습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망각’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망각은 기억만큼, 어쩌면 기억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프리드리히 니체는 말했습니다.
“망각은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다.”
이 말이 피부에 와닿았습니다.
이미 장기기억이 되어버린 절망을 지울 수 없다면,
다음 절망만큼은 빨리 잊고 싶었습니다.
망각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이 나옵니다.
사람이 학습한 것을 얼마나 빠르게 잊는지 보여주는, 아주 유명한 곡선입니다.
우리의 뇌는 고도로 최적화된 시스템입니다.
불필요한 기억은 쉽게 지우고, 에너지를 아낍니다.
컴퓨터도 인간을 따라 배웠습니다.
기억 저장과 활용을 최적화하기 위해 ‘망각 알고리즘’을 흉내 냈습니다.
에빙하우스는 말합니다.
사람은 한 시간 안에 절반 이상을 잊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에는 거의 80%를 잊습니다.
기억을 오래 남기려면 복습이 필요합니다.
1시간 후, 1일 후, 1주일 후, 1달 후.
4번 복습하면 장기기억이 된다고 합니다.
이 단순한 법칙이 우리가 알고 있는 ‘효율적 학습법’의 뿌리입니다.
문제는, 잊고 싶은 것들은 복습을 ‘너무 잘’ 한다는 점입니다.
절망은, 불안은, 괴로움은,
자꾸 복습됩니다.
한 달간 매일같이 떠올라서, 결국 완벽한 장기기억이 되어버립니다.
만약 복습을 막을 수 있다면 어떨까요?
단 한 달만, 강제적으로라도.
망각곡선의 원리를 거꾸로 사용해서.
방법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새로운 것을 입력하기.’
다른 일로 머릿속을 채워서, 절망이 복습할 시간을 빼앗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면 바쁘게 지내보세요.
가능하다면 낯선 곳으로 떠나보세요.
‘제주도 한 달 살기’ 같은 것은 괜한 유행이 아닙니다.
한 달간 다른 세계에서 사는 것, 그것이 치유가 되는 이유입니다.
물론 누구나 떠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특히 내겐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한 시간’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망각곡선을 보면,
사람은 사건 후 한 시간 만에 절반 이상을 잊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절망적 사건 직후의 첫 한 시간입니다.
이 골든타임 동안, 다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주 본능적인 차원에서. 어쩌면, 우리 뇌는 이미 이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심각한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은 종종 한 시간쯤 멍해집니다.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생존 본능입니다.
그 남은 절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필요한 것은 ‘리프레이밍’입니다.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니었어.”
“나에게 필요한 깨달음이었을지도 몰라.”
“다음번엔 좀 더 단단해질 거야.”
이렇게 사건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
그것이 리프레이밍입니다.
에픽테토스는 말했습니다.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이다.”
해석을 바꾸지 않으면, 절망은 영원히 머뭅니다.
술에 기대거나, 원망을 반복하거나.
망각이 아니라 희석을 시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진짜 치유는
희석이 아니라, 망각입니다.
그리고 진짜 망각은,
다른 의미를 부여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휘발성_메모리
https://ko.wikipedia.org/wiki/망각_곡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