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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기 Apr 09. 2021

0254


10/28, 18:42

경호는 42분째 1304호 베란다에 매달려 있다. 팔힘이 달리기 시작했다.

1204호 거실, 경호의 시선이 닿는 바로 그곳에 커다란 시계가 있었다. 덕분에 경호는 자신이 몇 분째 매달려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대체 뭐가 다행이라는 거지 하고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그 시계만은 또렷이 보였다. 둥근 모양의 숫자판이 있고 그 아래로 금속 재질의 추 세 개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들이 모두 하나의 거대한 장식장(처럼 보이는 것)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10/28, 18:00

처음에는 진짜 장식장 안에 시계가 있고 그 아래로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 장치 같은 것이 '전시'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주인이 특이한 취향을 가지고 있나 보네, '역시'. 뭐하는 사람이지? 하다가, 아? 아! 시계구나. 예전에 할매 집에도 비슷한 게 있었는데. 뭐라 그러더라...... 쾌종시곈가? 괘종시곈가? 그나저나 진짜 크네. 12층까지 옮기기도 힘들었겠,


기이이이익―


어? 저 '소리' 아냐? 저거 같,


대앵―


동시에 줄이 풀렸다. 경호는 베란다 난간을 잡았다. 미끄러졌다. 다시 잡았다. 매달렸다. 살았다. 죽지 않았다. 경호가 매달렸던 줄과 의자가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부서졌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옥상에 고정시켜 놓았던 줄이 풀린 걸까? 누가 풀어버린 걸까?


대앵―


정각이었다. 종소리는 느리고 위엄 있게 네 번 더 울렸다. 그 소리가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집 안에도 집 밖에도 아무도 없었다.




10/28, 18:30

에어컨 실외기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고마워요 삼성, 또 하나의 가족 같아 정말. 난간을 놓을 수는 없었지만 실외기를 밟고 있으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생각해 보자, 생각했다.


민원이 들어왔다. 135동 1204호.

이상한 기계음이 자꾸 들리니 확인해 달라.

민 주임님이 안 계셨다.

혼자 와서 기계실, 보일러, 엘리베이터를 확인했다.

마침 실외기 쪽에서 기계음이 크게 들렸다.

민 주임님 오셨을까? 아차 휴대폰을 놓고 왔네.

1204호 벨을 눌러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1304호, 1104호도 마찬가지.

1203호에도 아무도 없었다. 그럼 말았어야 했는데.

기이이이익―

하필 그때 또, 그 소리가 들렸다.

15층 건물이니까 뭐, 금방이겠지.

안전장치를 옥상에 고정하고 내려갔다. 

왜 그랬을까?


대앵―


깜짝이야. 어? 실외기가 움직였다. 기분 탓이겠지 했지만, 제발 그러길 바랬지만 실외기는 실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실외기 거치대와 난간 연결부위 중 한 곳이 20센티미터 정도 휘어지는 바람에, 실외기 전체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아직은 괜찮다. 괜찮지만 아직은, 얼마나 더 버텨줄지 알 수 없었다. 매달린 팔에 힘을 더 줘야 했다.    




10/28, 18:48

아무도 날 보지 못한 걸까? 실외기는 거의 45도 이상 기울었고 팔에 힘도 다 빠졌다. 온몸에 감각이 없었다. 감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통증은 맹렬하게 느껴졌다.


놓으면 편해질까?


아뜩해지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아야지. 경호야, 살아야지. 그러자 빛이 보였다. 빛이 다가왔다. 베란다 창에 다가오는 빛이 비쳤다. 경호는 고개를 틀어 빛을 보았다. 빛도 경호를 보았다. 그렇게 경호와 빛이 마주 보았다.


왜애애애앵―


빛은, 그 빛을 내는 기계는 경호를 잘 보기 위해 제자리에서 불규칙하게 움직였다. 그 동작은 왠지 자연스럽지 못했고 기계는 그래서 힘들다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경호는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보았다. 멀리 건너편 동 비슷한 높이의 베란다에 누군가 있었다. 빨간 불이 깜빡깜빡. 다시 빛을 내는 기계를 보았다. 스티커 같은 게 붙어 있었다. OO튜브...... 튜브라니, 공중에서 나를 보고 있는 튜브?!


야이 개 같은 새끼가 지금......

경호는 빛을 보며 욕을 퍼부었다.    


왜애애애앵―


웃는 건가? 조회수 올라가니까 좋다 이건가? 이 와중에 구독, 좋아요 꾹꾹 하는 미친 것들도 많겠지? 나는 죽겠는데! 가만. 그러고 보니 경호는 지금까지 한 시간 동안 매달려 있으면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분명히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했다.


살려 주세요오오오!

소리는 곧 사라졌다. 그 전보다 더 조용해진 것 같았다.

사람 살려어어어어!

도와 주세요오오오!


완전한 고요. 경호는 그렇게 느꼈다. 틀렸구나. 하는 순간, 개들이 짖어대기 시작했다. 135동 803호의 몰티즈를 시작으로 온 동네 개들이 미친 듯이 짖어댔다. 그제야 사람들이 나타났다. 몰려왔다.




10/28, 19:00

이제 더는 못 버틸 것 같았다. 손가락이 자꾸만 풀렸다. 그때마다 실외기를 지탱할 수밖에 없었다.


덜커덕,


실외기 거치대가 90도로 휘어졌다. 그에에에엑 바닥을 긁는 소리를 내며 실외기가 미끄러졌다. 그리고 아래로 떨어졌다. 굉음을 내며 부서졌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위어아아아아―


사이렌 소리였다! '위어아아(고잉)' 하며 조금만 더 버티라고 하는 것 같았다. 살았구나. 그제야 눈물이 났다. 드디어 소방차와 구급차, 경찰차까지 도착했다. 비슷한 듯 다른 가지 각종 사이렌 소리, (고마운) 개소리들이 공기 중에 가득했다. 덕분에 시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와중에 경호는 시간을 확인했다. 정각이었다.    


경호는 1시간 동안 1304호 베란다에 매달려 있다, 무사히 구조되었다.




10/29, 15:26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민원이 와서 살펴보러......

자살, 자살이라고 하셨어요? 제가 대체 왜......

파견직, 나이도 젊은데, 최저 시급 받는 게, 왜요?

불면증에 시달리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

동료들이 그랬다고요?

그래서 그날도 혼자 갔다고요?

그렇게 '증언'했다고요?

정말 죽으라 죽으라 하는군요.

거 보라니, 뭘 보라는 거예요?

대체 뭘 보라는 거냐고요!

볼 수 있는 게 있기는 한 거냐고!

뭘 봐 시발!




10/30, 18:01

그게 다 좋은 거라고 했다. 너도 좋고 나도 좋고 관리사무소도 좋고 아파트도 좋다고. 소장님이 내 맘을 어떻게 알아요? 나도 모르겠는데. 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번 '사태'로 인해서 주민들의 '불안과 불신'이 매우 커졌어. 시설물 관리도 제대로 못하면서 오히려 파손했다면서. 그리고, 그...... 언제 또 이런 일이 '재발'할지 모른다면서, 경비원 채용과 교육에 '만전을 기해' 달라고 그러면서......


소장은 휴대폰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구나. 누가 저따위로 써 준 걸까? 좀 자연스럽게라도 써 주지. 그래도 알아듣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민회에서 실외기 파손에 따른 피해 보상과 경비원 전원 교체를 요구했는데, 자신이 겨우 겨우 이쪽저쪽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잘 해결'되었다. 퇴직금도 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전체는 아니지만 실외기 값 떼고 (설치비는 업체에서 대기로 했다고, 그것도 설득이 쉽지는 않았다며 생색을) 그래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내일까지는 휴가로 해 줄 테니까 푹 쉬고. 좀 조용해지면 술 한 잔 하러 오너라.  


뭐가 '잘'이고 뭐가 '해결'되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경호는 그냥 알겠다고 감사하다고 했다. 소장은 경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고 갔다.




10/31, 02:43

잠이 오지 않았다. 경호는 유튜브에서 자신이 일하는(일했던) 아파트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그 OO튜브가 맨 위에 떴다. 경호가 매달려 있을 때부터 구조될 때까지의 1시간이, 18분으로 편집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고 있었구나. 상황에 대한 음성 해설과 '적절한' 자막이 더해져 영상은 꽤 '흥미진진'했다. 손에 땀을 쥐며 봤겠구나. 실제 댓글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만 명이 넘게 보았고, 수백 명이 '좋아요'를 눌렀다.


― 저러고 진짜 죽는 애들 본 적 없음. 죽으려면 혼자 조용히 죽지 동네 시끄럽게, 창피하게. 

― 구급대원들은 무슨 죄야? 밥도 못 먹고. 저런 것들도 살려야 되나? 나중에 벌금 왕창 때려야 함.

― 저런 것들이 꾸역꾸역 오래오래 살아요.ㅋㅋ 거지 같이 기생충 같이 남들한테 피해 주면서, 진짜 싫어. 어머, 기생충아 미안? ㅋㅋㅋㅋ


사람들은, 

어떤 그림이 보고 싶었을까?

무엇이 좋았고 무엇이 싫었을까?

어떤 결말을 원했던 걸까?  




10/31,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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