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과일이라는 달콤한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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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녹아




저는 계절마다 제철과일을 꼭 먹어야만 하는 병에 걸렸습니다. 봄엔 딸기와 참외, 여름엔 자두, 수박, 복숭아, 가을엔 감, 겨울엔 귤. 이 순환은 어느새 제 삶의 리듬이 되었고, 달력보다 정확한 계절의 시계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어린 시절 여름날들이 시작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랐는데요, 앞 집에 심어진 자두나무 아래서 떨어진 과일을 몰래 주워 먹던 그 맛, 그 달콤함과 함께 스며든 계절의 향기가 제 몸속 깊은 곳에 각인되었나 봅니다.


봄이 오면 제일 먼저 딸기를 찾습니다. 조금 작고 못생겨도 괜찮습니다. 씹는 순간 입안에 퍼지는 진짜 봄의 맛, 그 상큼함과 단맛이 겨울 동안 얼어붙었던 감각을 깨워줍니다. 참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특유의 향긋함과 시원한 식감이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 전 마지막 봄날의 여유로움을 선사합니다.


여름이 무르익으면 과일의 축제가 시작됩니다. 자두의 새콤달콤함이 입맛을 돋우고, 수박의 시원함이 더위를 식혀줍니다. 복숭아의 부드러운 과육과 달콤한 즙이 여름날의 피로를 달래줍니다. 이 시기에는 마치 과일 중독자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과일을 찾게 됩니다. 냉장고는 언제나 여름 과일들로 가득 차 있고, 제겐 보양식보다 더 든든한 여름 특식입니다.


가을이 되면 감나무를 올려다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주황빛으로 익어가는 감들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첫서리가 내린 후 더욱 달콤해진 감의 맛은 가을이 주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홍시가 되어 말랑말랑해진 감을 숟가락으로 떠먹을 때의 그 달콤함이란, 세상 모든 디저트를 압도합니다. 단감, 홍시, 감말랭이, 곶감 할 것 없이 좋아하지만 감을 많이 먹으면 화장실을 가고 싶어도 못 가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으니 유의하세요. 저도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겨울의 귤은 또 다른 의미입니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귤의 계절이 온다는 신호입니다. 손이 시려울 때까지 귤을 까먹는 것, 이불을 덮고 귤껍질 향이 방안에 가득할 때까지 먹는 것이 겨울의 소소한 행복입니다. 비타민 C가 풍부하다는 핑계로 하루에도 몇 개씩 먹다 보면 손바닥이 노랗게 변하기도 하지만, 그것마저도 겨울이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사계절 내내 모든 과일을 먹을 수 있으니 굳이 제철과일만 고집할 필요가 없죠. 하지만 저는 제철과일을 기다리는 시간, 그 과일이 나오는 계절을 손꼽아 기다리는 마음, 그리고 드디어 그 과일을 맛볼 때의 기쁨이야말로 인생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름 온 지금 자두와 수박과 복숭아를 부지런히 먹고, 가을엔 감을, 겨울엔 귤을 기다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내년 봄엔 다시 딸기를 찾아 나서겠죠. 이 달콤한 병과 함께, 계절의 선물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 제게는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입니다.


제철과일은 계절의 편지일지 모릅니다.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게 해 주고, 기다림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여러분이 기다리는 계절은 어떤 계절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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