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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의 이야기 #4

Saturday Night's Mistery Club

by NoZam

그 날은 꽤 이른 시간에 그녀의 호출을 받았습니다.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거든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꽤 이른 시간이네요"

"네. 빨리 오셨네요. 번번이 감사합니다."

어쩐 일인지 그 날따라 차 안에서도 반갑게 제게 말을 건네더군요.


"집으로 아시나요?"

"네. 그런데 오늘은 그 주위를 좀 둘러보고 들어가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그러시죠."

그 날 따라 그녀는 마치 기분 좋은 드라이브라도 하는 것처럼 약간은 들뜬 모습이었습니다.

"기분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그녀는 제 물음에 전혀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은숙이요. 제 이름... 채은숙."

"네? 아! 손님 성함이 채은숙이시군요. 음... 저는 K입니다."


제 대답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녀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까만 그녀의 머리카락이 차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심하게 날렸습니다.

"저, 손님... 바람이 센데,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잠시 후 그녀는 절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미소가 무척 익숙하다는 그런 막연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참 오랜만이에요."

"네?"

"아... 몸이 불편하니까 집 주위를 돌아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그게 저한테는 외출이나 여행 같은 기분이 들어요. K씨는 어떠세요? 자주 놀러 아시나요?"

그녀, 아니 채은숙 씨는 자연스럽게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저요? 글쎄요. 예전에는 그랬죠. 친구들하고 등산도 많이 다니고, 낚시도 많이 다니고 그랬죠. 나이 먹고 나서는 아무래도 시간이 없다 보니..."

"음. K씨는 결혼하셨어요? 미혼이시면 애인 있으신가요?"

"아. 전 결혼했습니다. 아기도 있는 걸요."

"네. 행복하세요?"

"행복이요? 글쎄요. 그냥 하루 벌어 먹고사는데 딱히 행복하다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해보지는 않았습니다. 솔직히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거든요. 그냥 사는 거죠. 그냥..."

"전 어떤 것 같으세요?"

"네?"

"K씨 보시기에 저는 행복할 것 같으세요?"

저는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혼자서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하기 힘든 하반신 불구의 몸을 가진 그녀에게 '당신은 행복할 것 같습니다.'라고 뻔한 대답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몸이 불구이시니 불행하시겠군요.'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녀는 그런 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차창밖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리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어요. 예전처럼..."


그 녀의 집에서 불과 백여 미터를 더 가니 청평호수의 물이 한눈에 들어오더군요.

그녀는 가까이 가서 보고 싶다고 했지만 차로 들어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죠.

휠체어라도 있었다면 태워서 데려가 주고 싶었는데 차 안에는 휠체어도 없었고...

한참 목을 빼고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녀는 돌아가자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목소리가 너무도 슬프게 들렸습니다.

"저... 괜찮으시다면 제가 업어 드릴까요? 그냥 돌아가시면 더 많이 아쉬우실 것 같은데..."

"아녜요. 힘드셔서 안 됩니다."

"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그동안 주차장에서 댁까지 모셔다 드리고 했었는데요. 뭘..."


그녀를 업고 청평호수 주위를 걸었습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게다가 제법 묵직한 보철장치를 달고 있는 다 큰 어른을 업고 걷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더군요.

"저, K씨. 저쪽 벤치 있는 곳에 내려주세요. 잠깐 앉아 있다가 가면 좋겠는데..."

그녀를 내려주고 그 옆에 앉았습니다.

"전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한 그 해에 사고를 당했어요. 그래서 하반신을 못 쓰게 된 거죠."

"네. 어떤 사고를 당하셨는데요?"

"글쎄요. 어떤 사고일까... 음, 사실 여기는 우리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곳이에요. 바로 이 자리..."

"네? 아... 그렇군요. 어쩌다가 여기에서? 사고를 당하셨나요?"

"나중에... 나중에 말할게요. 지금은 그냥... “

그 녀를 집에 데려다 주고 보니 열한 시가 넘었더군요.

"너무 오래 시간을 빼앗았나 보네요. 죄송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휠체어에 그녀를 내려주고 주방으로 갔습니다.

냉장고 문을 열고 주스 병을 꺼내고 보니 식탁에 잔 두개가 놓여있더군요.

두 잔에 주스를 따라서 들고 소파로 갔습니다.

"은숙 씨, 소파로 옮겨 앉으시겠어요?"

그녀를 앉아 소파에 옮겨주고 휠체어를 옆으로 밀어두었습니다.

"이렇게 둘이 앉아 있으니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 같네요."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그녀는 제 얼굴을 빤히 쳐다 보았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나면 관계가 발전하게 되는 걸까요?

저는 부담감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외도를 한다거나 하는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뭐랄까? 혼자 외롭고 힘들게 사는 그녀에게 의지가 되어주고 싶었다고 할까요?

그녀와 침대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내가 몸에 이런저런 보철 기를 달고 있어서 불편했죠?"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힘들지 않았어요?"

"저야... 뭐..."


그때 제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여보세요?"

"K기사님. 지금 어디세요?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으세요?"

"아! 지금 청평입니다. 손님께서 어디 좀 다녀오시는 바람에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그럼 전화라도 받으셔야 줘. 도통 연락이 안 되니..."

"죄송합니다."

전 그녀를 쳐다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녀도 재미있는지 킥킥대며 웃음을 참고 있었습니다.


"지금 오더 넣을 테니까 가보세요."

"네? 지금 청평인데요?"

"알아요. 그 여자 손님 모셔다 드린 거죠? 그래서 전화한 거예요."

"아. 지금 주차장인데요. 손님을 모셔다 드리고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제가 연락드려서 기다리시라고 할 테니까,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

"네... 근데 진짜 신기하네? 청평이 오더가 거의 없는데 저는 허탕 친 일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K기사님이 운이 좋으신 거겠죠. 뭐..."

사무실 여직원은 자기가 생각해도 신기하다고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옷을 입혀주었습니다.

"같이 샤워라도 하면 좋을 텐데 빨리 가봐야 해서... 미안해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빨리 가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었고 저는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항상 그렇듯 문은 쾅 소리를 내며 닫히고 불도 모두 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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