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퍼덕' 소리가 난 뒤에
길거리 신호등이 초록불에서 노란불로 바뀌는 것처럼 갑자기 몸에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신호를 줄 때가 있다. 빨간 불로 바뀌기 직전이니, 잠시 멈추라고 말이다. 그때, 찰나의 고민이 찾아온다. 액셀을 밟아서 빨간 불로 바뀌기 직전에 달려? 아님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를까.
그 찰나를 결정짓는 기준은 뭘까? 내 삶을 되돌아보면 거의 대부분 신호가 바뀌기 직전까지 아니 조금 바뀌어도 어떻게든 골인하기 위해 나름 고군분투했던 것 같다. 그 시간에 그 지점에 도달해야만 했으니까. 남은 힘이 있든 없든, 짐이 주렁주렁 과일처럼 매달려 있든지 말든지.
그렇게 안간힘을 쓰며 매달려 있던 나는 그렇게 '철퍼덕'떨어졌다. 내가 맞다고 생각했던 삶의 방식이 틀렸나 생각해 보기도 했고, 누워있다 바로 일어나지도 않고 이렇게 단단한 껍질에 들어갈수가 있나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다. 난 떨어졌고, 아팠고, 도망갔다. 다른 설명이 필요없다. 잘해보고 싶었는데 잘 안됐고, 여전히 사람이 중요했는데 그걸로인해 상처 받은 것 같아서 서글프고 서러웠다.
나의 이분법의 세계에서는 친구와 모르는 사람이 존재하며, 그 둘의 간극이 아주 크다. 그것이 나의 오만함과 유별남, 소심함과 예민함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내가 아픈 것처럼 타인의 아픔과 기다림도 나는 견디지 못한다.
때론 지나치게 솔직했고, 바보같아 보이기도 했을 것이며 모순적인 삶을 살기도 했다. 진흙탕에 누워 아무 것도 하지않고 누워 있어 보니 39살, 내 삶만 특별하게 빛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내 삶만 진흙탕 같은 것도 아니더라.
누군가는 나의 '부재'와 '안위'를 여전히 걱정해 주기도 했고, 그냥 말없이 곁에 기다려 주기도 했다. 우리들 마음 속에는 누구에게나 바람구멍이 존재한다. 그것이 드러나면, 대게는 약해 보일까 꽁꽁 싸매어 놓지만 여물지 않은 상처와 슬픔이 어느 날은 바람이 되어, 어느 날은 비와 눈이 되어 마음에 세차게 조용히 내려 앉는다.
'안녕'이라는 말이 헤어짐으로 느껴지면 마음 속 바람구멍처럼 허전하고 시리겠지만, 그 속에는 타인이지만 누군가의 딸이고, 아들이며 가깝고도 먼 당신에 대한 '안부인사'가 스며들어 있다.
우리는 같은 바람구멍을 가진 채, 서로의 안부와 안녕을 빌게 된다. 화려한 미사어구 없이. 어떤 목적이나 군더더기 없이.
그리고 그렇게 하루하루 다시 일어서는 연습을 꽤나 오랫동안 했다. 여느 때처럼 일어나 씻고, 산책하고, 청소하고, 따뜻한 밥을 먹고. 남들이 보기에 그 쉽고 간편한 일들이 나에게 '맨 처음'인 것처럼.
"거봐. 너도 별 수 없잖아."라고 한다면 "응. 맞아." 근데 나는 화내는 것도, 슬픈 것도, 아픈 것도, 좋은 것도 솔직해서 나의 "안녕!"과 "밥 먹었어?"라는 인사에는 같은 바람구멍을 지녔을지도 모른 이들에 대한 공감과 응원이 한 스푼 곁들여져 있다.
그러니 그렇게 다시 앉아있는 것부터 또 일어서서 매달리는 연습부터 다시 할 수밖에 없다. 탈탈 털리고 철퍼덕 넘어져도. 그렇게 다시 푸쉬업을 하고, 그 놈의 견갑 운동, 라운드 숄더 개선운동. 덜도말고 더도 말고 하루에 하나씩만.
그러니, 잘 자고 잘 먹고 아프지 않고,
오늘 하루도 고생했고, 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