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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작 Nov 10. 2015

지하철 안에서의 시간


외계인이 지구에 침공해,
(하필이면) 지하철에 착륙해서
(생뚱맞게) 우리의 휴대폰을
모두 빼앗아간다면?


휴대폰을 빼앗긴 지하철 안에서의 시간. 과연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사람들은 어디를 쳐다볼까?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할까? 출근길 나는 이런 이상한 상상을 하며 휴대폰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람들을 천천히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일을 절대 일어날 일이 없다는 것처럼 무심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날로그 라이프를 살아보기로 하면서 가장 먼저 개선하고 싶었던 것은 지하철 안에서의 시간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지하철에 들어서면 나는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만을 바라보았다. 집에서만 할 수 있었던 인터넷을 휴대폰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대단한 모바일 혁명인 휴대폰으로 지하철에서 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1. 메신저 친구들 바뀐 프로필 보기 2. 포털 사이트가 메인으로 띄우는 기사 읽기 3. 음악 듣기 4. 포털 사이트가 메인 아래로 띄운 기사 읽기 5. SNS에서 낚시성 기사에 낚이기'였다. 그리고 내릴 역에 도착할 때면 눈이 빡빡해졌다.

할 것이 없으니까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면 기분이라도 유쾌하면 괜찮을 텐데, 내가 그리 원하지도 않았던 정보를 무작위로 접한 후엔 머리가 복잡하고 하얘졌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하얀 수정테이프로 쫙 그어버리는 느낌. 그리고 대게는 그런 시작과 끝이 이어지며 내 안에는 어떤 기록도 남지 않은 듯한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나만 그런 것일까? 오랜 시간 동안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는 저 사람들은 필요한 정보만을 수집하고 재밌고 즐거운 시간들만을 보내며 자신을 채워나가고 있는 것일까?



오늘은 지하철 안에서는 휴대폰을 꺼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는 정말로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곧 굉장히 뻘쭘해졌다. 할 것이 없었기 때문. 사람들은 여전히 휴대폰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나도 그들처럼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한 정거장 한 정거장이 지날 때마다 더 뻘쭘해졌다. 심지어 초조해지기 까지 했다. 시선을 어디에다가 두어야 할지도 몰랐다. 중독의 초기 증상 같았다. 그러나 지금 휴대폰을 꺼낸다고 하더라도 할 것이 있는가? 마땅히 할 것이 없다. 그래서 휴대폰으로 할 것이 없는 나는 또 1. 친구들의 프로필 보기 2. 포털사이트에서 골라준 기사 읽기 3. 자극적인 낚시성 글 읽기 등을 반복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간단하다. 휴대폰 없이 지하철의 시간을 보낼 무언가를 찾으면 되는 것이다.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었던 하루의 시작과 끝은 굉장히 소중한 시간일 것이다. 인생을 통째로 지하철에서만 보내는 시간을 합쳐보면 친구와 보내는 시간보다 많을 것이다. 또 이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아침, 마지막 저녁일 수도 있다. 시작을 어떻게 하고, 끝을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인생이 전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시간이 굉장히 소중하니 '영어 단어를 외워야 해'라거나 '벼르고 있는 증권 책을 읽어야 해'라는 억지는 부리는 것은 건강상 좋지 않겠다. 나의 경우엔 이런 것들은 100% 실패한다. 왜냐하면 낚시성 모바일 중독을 뿌리칠 수 있는 대체제가 '영어 단어'나 '증권 책'이라면 패배를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현실 가능성 있는 더 재미있는 대체제(즉, 낚시성 모바일 기사보다 더 의미 있고 재미있는 대체제)가 필요했다.


첫째 날 가장 먼저 한 것은 '바라보기와 상상하기'였다. 나는 난생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과 빛에 반짝이는 낚엽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늘은 어떤 소소하고 재미있는 일들을 만들어나갈지 상상했다. 어젯밤 꿈처럼 미남이 내게 말을 건다면? 그와 저녁 드라이브를 한다면? 말도 안 되는 상상도 해보았다.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상상은 자유니까.

내가 한 것은 공상뿐만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예쁜 말을 할지도 생각하고, 그 사람의 표정도 상상해보고, 앞으로 내가 할 업무를 성공시킨다면 얼마나 기쁠지도 상상해보았다. 인생이라는 도화지를 펴고 색을 입히기 전 마음속으로 아름다운 스케치를 해보았다. 


둘째 날 아침에 한 것은 책 읽기였다.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한다. 책이 있다면 모바일 중독을 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였다. 대게 모바일에서 읽는 글들은 짧고, 가벼운 경향이 있었고 낚시성 문구들에 쉽게 현혹되어 파도 타기를 하면서 내가 원하지 않는 정보까지 얻기 일쑤였다. 

하지만 책은 다르다. 도서관에서 취향에 맞게 고심해서 고른 것이며 그 글들은 깊이가 있어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성장시키기도 한다. 지하철 안에서의 시간은 특히 유쾌한 시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무조건 즐길 수 있는 책을 선택했다. 



내일의 아름다운 구름, 빛, 잎사귀들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내일은 어떤 재밌는 일들이 일어날까? 책 안에는 어떤 재미있고 유익한 이야기들이 펼쳐질까? 그로 인해 나는 어떤 내가 될까? 


지하철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지 않았을 뿐인데- 

놀랍게도 내일의 삶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이젠, 휴대폰 없이.




글. 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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