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가을비는 저녁까지 계속 내리고 있었고, 옆 동네 오스틴에서는 눈발이 날린다는 소식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이는 초저녁부터 친구들과 텍스팅을 하면서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캘리포니아 산불 사태의 실태를 눈으로 확인하며 심란해하던 중이었다. 거대한 산 전체가 새빨갛게 활활타고 있는 모습은 정말이지 재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기억하는 한, 캘리포니아 산불사태는 최소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부시 대통령 임기중에 있던 15년 전에는 산불 방지 대책으로 그 일대의 나무를 죄다 베어버리자는 방안이 제기되기도 했었던 것을 기억한다. 부시 행정부는 참 쉽게 답을 내는구나 어이없어했던 기억도. 그러고도 지난 15년간 산불은 해마다 지역을 곤궁에 빠뜨려왔으니 그 때 베어버리는 것이 맞는 해법이었던가 하는 생각도든다. 불길에 휩싸인 천사들의 도시에 애도를 보내고 있을 즈음에, 텍스팅을 마친 아이는 비실비실 웃으며 내 방으로 달려와 침대 위로 몸을 날리며 외쳤다.
"내일 아침에 학교를 안 갈 수도 있어요. 눈이 온데요."
"흠... 너 좀 오버 하는구나 ."
피식 웃어주었더니 눈이 오는 것을 자기 두 눈으로 보았다며 엄마에게도 확인시켜 주겠다고 했다. 집 밖으로 데려가 가로등을 보라고 했다. 가로등 아래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으면 눈이 내리는 것을 확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문을 걸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희끗한 것이 날리기는 했지만, 가로등 불빛 아래서는 날리는 모든 것들은 희끗해 보이니까.... 이웃동네 친구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마친 자기 집 정원에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현상의 증거를 보내왔다. 그렇게 12월 초순의 습기 많은 저녁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고, 느닷없는 겨울의 매직이 우리를 맞았다.휴교령은 없었고, 스쿨버스는 제시간에 아이들을 태우고 떠났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에는 포도알의 외눈박이 눈사람이 남겨져 있었다.
막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넒은 책상이 있는 서재를 아이와 남편에게 내주고 나는 침실 창가의 간이 책상으로 물러났다. 침대와 창 사이의 좁은 공간에 끼어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책상 앞에 앉은 채 손을 뻗어 창문의 블라인드를 걷으면, 언제나 핑크색 장미가 그 의연한 자태를 드러내곤 했다. "언니 안녕~? 보시다시피 우린 늘 항상 별일 없지요." 지난 겨울 이맘 때쯤 틸러를 빌려다가 잔디를 뿌리까지 걷어내고, 흙을 부어 만든 DIY 프로젝트의 결과이다. 스템이 굵은 핑크색 장미 나무 다섯 그루와 로즈매리 여섯 그루를 두 줄로 심어 두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장미는?
어..... 언니 안녕?.. 근데 좀 춥다.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목화 송이가 아니구요. 어디까지나 시들어버린 장미 송이....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도착했을 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오늘 분량의 파란 하늘.
봄 여름 여름 여름의 파격에 힘이 빠져서 며칠 전에는 계절의 파업사태니 겨울의 실종이니 하며 투덜댔었는데, 뭔가 잘못한 기분이 들어 반성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파업 후에 오는 것.
실종 뒤에 찾은 것.
지난 열 두시간 우리를 찾아와 준 겨울의 매직이 일탈인 것인지, 열 두시간을 제외한 12월의 나머지 시간들이 계절의 일탈일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예기치 않았던 열대의 눈꽃송이가 만개한 모순형용의 12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