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Scene)에게 재배열이 필요하다.
완벽하지 않다. 창가에 드는 빛은 창밖의 미래로 볼 수 있다. 지난 세기에 파트너가 된 사람들이 지금까지 있다.
하필 그게 이 세기의 생물이 되어 다음 세기의 마음을 줄줄이 배양한다.
어쩔 수가 없다.
“생일 축하해. 태어난 지는 한참 됐지만.”
사람의 뼈도 물고 씹으면 칼슘이 섭취되고 치석을 없애서 치아 건강에 도움을 준다.
사람이 사람의 용도가 되지 않을 뿐.
거대한 바위와 나무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건축은 예술에서 아름다움을 박리시켜 둘을 별개로 연상하도록 요구한다.
예술적인 아름다움은 알고리즘이다.
슬픔을 더 잘 아는 광고가 있고, 이미 가진 걸 여전히 권하는 기계가 있고, 사람이 없어진 자리에 사람을 구성하던 알고리즘을 대입해 주는
저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살아남아 잠들지 못하는
저녁.
누군가 마음을 우는 것으로 대신하려 하고 있다. 진동과 소리를 모두 켜 둔 채로 받아 주길 바라고 있다.
무엇이 지나갔을까. 중간부터 시작된 꿈처럼.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 이전을 깨워 두는 것도 이후와 같았을까.
“우리는 안 보이는 선분으로 이어져 있어. 점점이 찍히는 빛의 뻗어 나가는 형태로. 그 길을 따라 우리를 태운 열차가 지나가기도 하지.”
달리는 차창 너머로 배경이 보인다.
우는 걸로 보인다.
건너편에 앉은 사람 너머로 인물이 보인다.
우는 걸로 보인다.
안 좋은 일이 생기고 있다.
달리다 멈추는 순간 점유할 수 있는 부피를 초과하는 질량. 터지기 직전까지 몸 안에서 팽창하는 몸.
서서히 잦아드는 동안에
소중히 넣어 둔 걸 다시 꺼내 보고 있다. 같이 잃은 게 없다면 남은 건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살고 있다는 곳에 찾아가면 떠나고 없는.
그러나 사람의 형상이 형태를 얻게 된다는 걸 잠깐씩 잊을 뿐. 찾으러 온 걸 잠시 모두 잊어버릴 뿐.
우리가 누구에게나 같은 심장일 때
뛰는 두 개의 마음 중 하나는 진짜
다른 하나는 진짜의 미래라서 여기가
이전과 이후가 되고 있다.
수평에서 수직으로 놀이가 되어 가고 있다. 상상이 초과되는 만큼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초과하고 있다.
업데이트되고 있다.
오래전의 미래가 거의 소진되고 있다.
더는 갈 곳이 없을 때.
기계가 기계의 잠재태가 될 수 없을 때.
추락과 붕괴가 당연히 연상된다. 그것을 믿어서 그것이 예정된다.
피할 수 있는 걸 피하지 않는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이 발굴될 발굴지를 만들고
자라고, 사랑하고, 늙고, 병들고, 죽어 가고, 없는 데서 없어지는 걸 이해할 수 있는
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도 남은 게 있다.
쓰고 남은 게 남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금까지의 서정을 바닥에 내던져 깨뜨리고 유리 조각 사이에서 안에 있는 걸 꺼내 갈기갈기 찢어 던져 버린다.
“미래라고 현실 문학이 유행하겠니?”
이 모든 건 하나의 장면이고
한 장의 이미지로 축약이 가능하며
정지된 상태를 촬영하는 방식으로 영상이 된다.
이것은 그런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