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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해경 Jan 12. 2024

[런던라이프] 런던에서 꼭 방문해야 할 미술관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런던 #22 런던 미술관에서 놀자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런던   


#22 런던 미술관에서 놀자   


런던에서 수많은 볼거리가 있지만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미술관이다. 대부분의 미술관들이 전부 무료라는 점을 감안하면 런던에서 미술관 관람은 필수다. 게다가 유럽 대부분 미술관이 월요일이 휴일이지만 영국을 대표하는 4개의 미술관인 내셔널 갤러리, 대영박물관, 테이트 모던, 테이트 브리튼은 월요일에도 오픈한다. 런던에서 꼭 봐야 할 미술관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쓰긴 했지만 내가 가본 곳 중에서 내 맘대로 소개하는 미술관이라는 점은 참고하길. 런던에서 박물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은 따로 소개할 예정이다




내셔널 갤러리(The National Gallery) 


작년에 중앙박물관에서 영국 내셔널 갤러리 소장 52점을 전시했고 그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지만 나는 가보지 않았다. 런던에서 내셔널 갤러리 작품을 이미 여러 번 봤기에 한국에서 전시는 패스했다. 물론 그림이라는 게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이니 보고 또 보고 해야 하는 것이 정석이겠지만  런던 현지에서 내셔널 갤러리를 보고 온자의 한 스푼 정도의 허세랄까. 


런던에서 가야 할 수많은 미술관 중 내셔널 갤러리는 영국에서 아니 유럽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미술관이다. 나 역시 런던에서 가장 먼저 갔던 미술관이었다. 렘브란트, 티치아노, 반 고흐, 보티첼리, 터너 등 미술사에 등장하는 화자의 작품이 수두룩하다. 중세 시대부터 초기 르네상스의 작품 대략 2,300여 점 이상이나 보유하고 있는 곳이라 다 둘러본다고 해도 반나절은 훌쩍 보내게 된다.  


런던 시내 중심인 트라팔가 광장에 위치하고 있는 내셔널 갤러리는 개인적으로 낮보다 밤 풍경이 더 운치가 있었다. 저녁 10시경 어둠의 적막을 깨뜨리는 건 몇 남지 않은 사람의 발자국이 전부인 시간에 넬슨기념탑에 앉아 내셔널 갤러리를 바라보면 건물 자체가 설치미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셔널 갤러리의 낮과 밤 

가장 인기 있는 미술관답게 입구는 언제나 긴 줄이 늘어서 있다. 검색대를 거친 후 안으로 들어가면 서관, 북관, 동관 등 어디를 먼저 가야 하나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엄청난 작품이 관람자를 기다리고 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 미술애호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내셔널 갤러리는 입구부터 죽 따라가기만 하면 시대별로 저절로 그림 감상이 된다. 걷다 보면 중세부터 르네상스 초기까지 유럽 미술이 어떤 식으로 지나왔는지 알 수가 있다. 초심 관람자를 배려한 동선 구성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꼭 이 동선을 따라갈 필요가 없다. 성질 급한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가야 할 방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곳은 바로 고흐 작품을 비롯해 우리에게 익숙한 명화가 대다수 전시되어 있는 45번 방이다. 워낙 유명한 작품들이 많아  이곳은 언제나 관람객들로 북적북적한다. 내셔널 갤러리 입구에 전시 평면도가 배치되어 있으니 그걸 참조하면 어떤 작품이 어디에 있는지 좀 더 쉽게 알 수가 있다. 꼭 그런 것이 없더라도 중요 작품이 몇 번 방에 있는지 곳곳에 안내가 되어 있으니 화살표만 잘 따라가면 된다. 


워낙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이고 중요한 그림들이 있는 곳이다 보니 유럽을 중심으로 극렬 환경운동가들의 '명화(名畫) 테러'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고 있는데 내셔널 갤러리도 중요 타깃 중 한 곳이다. 자칫하면 반고흐의 '해바라기'와 벨라스케스의 '거울 보는 비너스'가 훼손될 뻔했다. 하지만 이들도 이 그림의 가치에 대해 알고는 있기에 아직까진 시늉 정도에 그치고는 있지만 좀 불안한 건 사실이다. 기후 위기도 중요하고 환경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불법 행위가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환경단체 '저스트 스톱 오일' 소속 회원들에 의해 토마토소스 테러를 당했던 고흐의 해바라기 
벨라스케스의 '거울 보는 비너스'는 같은 단체에 의해 망치를 들고 그림을 훼손하려다 잡혔다. 
고흐의 그림이 있는 곳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빈다.
봐야할 그림이 수두룩 빽빽


그림을 볼 때면 의외의 작품에 눈길이 머물 때가 있는데 내셔널 갤러리에서 완전 반했던 작품은 바로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jean baptiste camille corot)가 네 개의 페널에 그린  'The Four Times of Day'이다. 내가 좋아하는 고흐보다 이 그림이 더 마음에 와닿았다. 


이 그림은 파리 남동쪽에 있는 퐁텐블로 숲의 새벽, 정오, 저녁, 밤의 4가지 시간대를 담은 그림인데 보자마자 숨이 턱 멎을 정도로 강렬했다. 하루의 시간 안에 담긴 초록의 계조 표현은 어마어마했다. 코로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낭만주의, 사실주의 화가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 이 그림이 낭만파 화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숲의 주는 고요함, 연하게 부는 바람,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 그리고 어김없이 다시 내일을 기다리는 소중한 하루. 그림은 잔잔한데 무수한 말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림에서 이런 느낌을 받은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프린팅이 있었다면 사 오고 싶을 정도로 좋았던 그림이었다.  

수천 그림 가운데 내 마음을 끌어당긴 그림. 
윌리엄 터너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도슨트. 시간이 맞는다면 도슨트 프로그램도 참여해 보자.



테이터 모던(Tate Modern) 

내셔널 갤러리에서 고전미술을 봤다면 다음 차례는 현대미술이다. 현대미술하면 자연스레 '테이터 모던'을 떠올릴 정도로 현대미술의 대명사가 된 테이트 모던이다. 테이트 모던은 옛 발전소가 갤러리로 재탄생한 곳으로도 도시 재생으로도 굉장히 각광받는 곳이다. 이곳 역시 달리, 피카소, 앤디 워홀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작품은 물론이고 회화, 사진, 조각, 드로잉, 멀티미디어 등 현대미술 작업을 총망라하고 있는 곳이다. 

발전소 자체 건물만으로도 이미 압도하는 테이트 모던. 카페 테라스에서 템즈 강 전망은 필수다. 


발전소였던 덕분에 공간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니 입구에서 설치미술은 수미터가 넘는 큰 작품임에도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떤 작품들은 다른 미술관에서는 전시조차 할 수없겠구나 싶을 정도로 상당한 크기인데 데이트 모던에 걸리면 사이즈 따윈 신경 쓰지 않은 채 작품을 보게 되는 신기함이 있었다. 

공간이 워낙 크다보니 어마어마한 작품 사이즈인데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설치 미술로 하나의 전시실을 꽉 채우고 있다. 
오~ 한국작가의 작품들


규모가 상당한 곳이니 각 전시실마다 돌아다니다 보면 다리가 아프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곳이다.
습작하는 예비작가의 모습 

내가 머무는 동안에 일본 작가인 '쿠사마 야요이' 전시가 이곳에서 있었다. 일반 전시는 무료지만 특별전은 유로 관람인데 야요이 전시가 어찌나 인기가 많은지 예약도 만만치는 않았기에 쿠사마 야요이의 특별 전시는 보지 못했다. 대신 쿠사마 야요이 특별전의 일환으로 관람객들의 참여전시가 로비에서 있었다. 이 전시는 어학원 액티비티로 함께 전시를 보러 갔었다. 무엇이 어떻게 변해갈지 작업이 끝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현대미술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시킨 관객 참여형 작업은 꽤 흥미로웠다.  

쿠사마 야요이 특별전의 일환으로 진행된 관객 참여. 열심히 스티커 붙이는 중


테이트 모던에서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작품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Ready Made'다. 20세기 현대 미술을 논할 때 가장 많은 예를 들게 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야말로 현대미술에서 예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예술이냐 아니냐로 한동안 미술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나에게 테이트 모던 = 뒤샹의 Ready Made로 각인되어 있을 정도로 꼭 한번 보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사진으로만 봤던 'Ready Made'를 보는 순간, 비로소 내가 영국에, 런던에, 현대미술의 최전선에 서 있는 데이트 모던에 있다는 걸 실감하던 순간이었다. 

내 눈으로 꼭 보고 싶었던 'Ready made'


테이터 모던에서 꼭 빼놓지 않아야 하는 또 하나의 공간은 바로 카페인데 카페 테라스가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밀레니엄 다리 너머로 보이는 세인트 폴 대성당은 런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뷰 포인트다. 집이 이 근처였기에 이른 저녁을 먹고 산책 삼아 테이트 모던을 한 바퀴 돌고 카페 전망대에서 출석도장을 찍듯 세인트 폴을 봤다. 그리고 나면 자연스레 발걸음은 밀레니엄 브리지를 건너 세인트 폴을 향해 걷던 런던 산책의 맛. 런던에서 꼭 한번 느껴보시길. 

테이트 모던 또 하나의 명소


런던은 현재 모든 초점이 하나의 주제, '환경'이었다. 환경은 이제 가장 중요한 화두이고 런던 예술계는 한 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야외 전시공간에 거대한 드로잉 작품으로 만든 작품은 지구 생태계를 떠올리게 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숲 속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다양한 새소리, 동물 소리와 바람소리가 마음을 절로 평안하게 만든다. 다소 무거운 주제임에도 '종이 오리기'라는 친근한 소재와 쉬운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환경'에 대해 다가가는 전시는 놀라웠다. 예술이 가진 힘을 느끼던 순간이었다. 

요즘 런던은 무조건 '화경'이다.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

내셔널 갤러리가 중세 시대부터 초기 르네상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면 그다음 시기의 작품은 어디서 봐야 할까? 테이트 브리튼이다. 이곳은 중세 이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영국작가들과 영국에서 활동한 작가의 작품들을 주로 전시하는 미술관이니 내셔널 갤러리 다음 수순은 테이트 브리튼이다. 굳이 두 곳은 비교하자면, 테이트 모던이 동시대 현대미술이라면 테이트 브리튼은 전통적인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회화나 조각 위주의 전통적인 작품만 있는 것은 아니다. 테이트 모던처럼 아방가르드적이지 않을 뿐 현대미술 작품들도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도 오래됐고 전통예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라고 해서 실내는 큰 기대 없이 들어갔는데 깜짝 놀랐다.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된 현대감각이 가미된 나선형의 계단은 낡은 느낌이라곤 1도 들지 않았다. 1997년에 미술관 100주년을 맞이해  '밀뱅크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미술관을 확장하고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한 결과였다.  밀뱅크는 테이트 브리튼이 위치한 지역 이름이다. 

고풍스러운 느낌을 자아는 테이트 브리튼의 로툰다와 독특한 이미지의 원형계단이 세련미를 자아낸다.


미술관을 들어서면 생각했던 것보다 넓은 공간이라 어디를 가야 하나 잠시 고민을 했다. 입구를 기준으로 왼쪽은 내셔널 갤러리처럼 영국의 근현대 미술 작품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고 오른쪽은 영국의 현대미술을 전시하고 있다. 



이 미술관이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의 작품들만 전시된 공간이 별도로 있기 때문이다. 터너가 죽으면서 모든 작품을 국가에 기증했는데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할 공간이 부족해 테이트 브리튼에서 소장하고 있다.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엄선한 터너의 작품 7점만 소장하고 있으며 전시하고 있다.   


'터너'라는 작가에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 전시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다른 작가들과 화풍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저절로 알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안개가 많이 끼는 전형적인 영국 날씨를 담았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그의 작품들은 몽롱했다. 터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는데 테이트 브리튼에 즐비한 그의 작품을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된 작가 중 한 명이다. 


낭만주의 화가인 터너는 당시에는 영국 출신의 몇 안 되는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다. 마치 안갯속을 헤집는 화풍은 거의 추상에 가까운데 신기한 건 그의 화풍을 이어받은 후계자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이하건 그의 화풍은 프랑스에서 인상주의로 재탄생하게 됐다고 한다. 대체로 마네가 아마도 터너의 그림을 봤고 그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한다는데 그러고 보니 마네의 그림이 묘하게 터너의 화풍과도 닮았다. 

터너의 작품 
모네가 그린 웨스트 민스터
테이트 브리턴에서 유명한 작품들 (강렬했던 오필리아는 한참을 봤는데 왜 사진을 안 찍었을까?)


전통적인 미술 위주의 작품들이 많지만 현대예술 작품들도 볼 수 있었다. 테이트 모던의 작품들에 비해 조금 얌전한 느낌이지만 나름대로 독특하면서도 실험적인 작품들이 꽤 많았기에 테이트 모던과는 또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곳에 전시된 작품들은 시간이 촉박해 다음에 한 번 더 전시를 보러 가야겠다 생각을 했었는데 결국 두 번 방문은 하지 못해 개인적으로 굉장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미술관이다.  

전통적인, 현대적인 작품들이 어우러지는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의 브런치 


서머셋 하우스(Somerset House)

서머셋 하우스는 미술관도 유명하지만 스케이트장도 빼놓을 수 없다. 겨울이면 미술관 마당에 거대한 아이스링크가 설치되는데 겨울에 런던을 여행한다면 꼭 한 번 방문해야 할 장소로도 추천하는 곳이다. 10월 말 경에 서머셋 하우스를 방문했을 때 아이스링크 설치가 한창이었기에 완성된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서머셋 하우스 아이스링크는 11월 중순부터 다음 해 1월 초까지 운영한다. 


입구부터 장대하며 의리의리한 건물은 갤러리라고 하기엔 너무 압도적이었다. 이곳은 에드워드 6세 국왕 시절 서머셋 공작의 집이었다. 헨리 8세의 유일한 적자였던 에드워드가 9살의 어린 나이에 국왕에 오르자 외숙이었던 서머셋 공작은 모든 권력을 거머쥐고 권세를 누렸다. 하지만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고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사후 수백 년 동안 영국 왕실과 귀족의 거처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갤러리 외에도 음악, 영화, 공연 등 다양한 전시가 열리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실제로 작년 3월엔 한국 작품인 '달 항아리' 공연이 열리기도 했는데 런던에서는 꾸준히 한국 예술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중이다. 

아이스링크 설치중인 서머셋 하우스


서머셋 하우스에는 여러 장소가 있는데 가장 유명한 곳은 더 코톨드 갤러리(The Courtauld Gallery)다. 정문 아치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갤러리가 위치한다. '유럽 최고의 인상주의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라 규모가 상당할 줄 알았는데 규모는 다른 갤러리에 비하면 정말 작은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은 유수의 어느 갤러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상파 화가들인 고흐, 고갱, 마네, 드가, 르누아르 등의 작품을 비롯해 마티스, 칸딘스키 등 현대미술 작가의 작품들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미술관이 무료인 것과 달리 이곳은 유료입장이지만 돈을 내고서라도 볼만한 그림들이 꽤 있었다.  

작품을 보기 전에 반했던 나선형의 계단과 입구 
각 층마다 작품들이 있는데 주요 작품들은 맨 꼭대기층에 전시되어 있으니 맨 위층부터 관람하면 좋다. 
고갱, 마네, 드가, 르누아르, 마티스, 칸딘스키 등 유명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그림 외에도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서머셋 하우스에서 눈에 들어온 화가는 뜻밖에도 '세잔'이었다.  고흐를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워낙 쟁쟁한 인상파 화가들이 많으니 겉 핥기 수준의 감상자로선 사실 세잔까지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세잔의 그림을 직접 보고 나니 솔직히 다른 그림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인쇄술이 발달한다고 한들 수많은 초록의 계조를 담아낼 수 없다는 걸 서머셋 하우스에 걸린 세잔의 그림을 보고 다시 한번 더 깨달았다.  


적어도 내 눈엔 세잔의 그림이야 말로 도판 그림과 실제 그림 사이의 간극이 가장 큰 작가였다. 풍부하면서도 다양한 초록색이 무수히 뒤엉켜있는데도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는 세잔의 그림. 게다가 초록이 뿜어내는 따뜻하고 온화한 느낌은 그간 세잔의 그림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초록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싶어 감탄에 감탄에 감탄에 마지않았던 세잔이었다. 세잔 작품의 진면목을  느끼게 해 준 서머셋 하우스에 진심 고마웠다. 

초록이 가득한 세잔의 그림 


고흐,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서머셋 하우스 굿즈숍 고흐 파우치  
하나하나 볼거리 가득했던 서머셋 하우스 굿즈숍
품절이라 사지 못했던 스케치북은 여전히 아쉬움 한가득  


영국 왕립 미술원(Royal Academy of Arts)  


영국 로열 아카데미를 가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피카딜리 스트리트에는 즐비한 명품거리가 있고 고풍스러운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잇고 있는 아케이드는 나에게는 또 다른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몇 개의 아케이드를 찾아다니던 중 RA라고 적힌 붉은 깃발이 너무 눈에 띄었다. 명품거리의 여느 호텔인가 싶었는데 RA은 다름 아닌 영국 왕립 미술원(Royal Academy of Arts)의 약자였다. 


영국 왕립 미술원은 영국 최고의 미술대학교로도 손꼽히는 곳인데 다양한 특별전이 열리는 갤러리로도 유명했다. 특히 여름에 열리는 특별전시들은 꼭 봐야 할 전시 목록에 항상 이름을 올리는 곳이란다. 뭣도 모르고 길을 가다가 발견한 왕립 미술원은 나에게는 그야말로 얻어걸린 셈이다.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클래식한 동상들은 누구일까 궁금했는데 세상에나 뉴턴, 벤담 등 영국을 빛낸 위인들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왕립 미술원이 어떤 곳인지 입구 동상만으로 설명이 충분했다. 

뉴턴, 벤담 등 영국 출신의 학자, 예술가, 사상가 등이 입구를 장식하고 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조각 등 다양한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건물을 지나가면 중정이 나오고 다시 또 건물이 이어졌다. 중정을 둘러싼 사각형의 건물이라 꽤 신기했다. 이중 두 개의 건물은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었고 나머지 양쪽의 건물은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건물 자체가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분위기니  현직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다양한 분야의 교수진들과 함께 학생들이 다양한 작업들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곳이라 상상만으로도 공부할 맛이 나겠다 싶었다. 실제로 홈페이지를 확인해 보니 3년 석사과정에 선발되면 모든 과정이 무료로 제공된다고. 전략적으로 현대 미술계를 이끌어갈 인재를 키우는 곳이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왕립예술원


이곳의 특별전이 꽤 유명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고 했는데 내가 방문했을 때 두어 가지 무료 상설 전시가 있기는 했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전시는 아니었다. 다만 왕립이라는 이름 때문에 좀 고루한 작업을 추구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전시되는 작품들은 회화보다는 시각예술, 건축, 디자인 등 굉장히 현대적인 작품들이 많은 점은 매우 흥미로웠다.  


이곳에서 가장 특이하다고 느꼈던 건 갤러리 양쪽 벽면을 꽉 채운 두 그림이 있는 방이었다. 이날 동호회 회원들인지는 모르겠으나 여러 사람들이 개인용 휴대의자에 앉아 그림을 보면서 장시간 토론이 이어졌다. 마지막 만찬의 그림을 쳐다보며 어찌나 진지한 토론이 이어지던지 그림에 가까이에 다가가서 좀 보고 싶었는데 이들의 토론에 방해가 될까 봐 먼발치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도슨트인지 학예사인지 한 사람이 등장했고 이들은 자신들의 토론을 토대로 그림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고 질문 하나하나에 그림을 짚어가며 다시 또 토론이 이어졌다. 단순한 그림 감상이라기보다는 거의 공부에 가까운 관람은 계속 이어졌다. 미술관을 자주 가는 편이기는 해도 이런 식의 관람문화는 그 어떤 곳에서 볼 수 없었던 풍경인지라 정말 인상적이었다. 

정말 인상적인 미술관 풍경 


RA에서 특별했던 또 하나는 '포스터 바(Post bar)'였다. 전체 벽면을 모두 전시 포스터로 장식하고 있는데 내 취향이었다. 이곳에서 열렸던 전시포스터를 시대별로 하나하나 보고 있자니 포스터 디자인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여기는 맥주, 와인, 칵테일, 커피 등을 비롯해 다양한 메뉴를 갖추고 있는데 금요일 저녁에는 지정된 음료를 주문하면 핀초(Pincho)가 함께 제공된다고 한다. 셰프가 스페인 출신이라 왕립 예술원 내의 레스토랑과 카페에서는 모두 스페인식 식문화를 즐길 수 있는데 마감시간이었기에 아무것도 맛볼 수 없어 아쉬웠다. 다음에 런던을 가게 되면 반드시 금요일 오후에 가는 거로!  

전시 포스터가 인테리어 
데이비드 호커니(David Hockkney)도 이곳에서 여러 번의 전시를 했다.


월리스 컬렉션(The Wallace Collection) 

어학원 수업의 일환으로 선생님은 미술관 관람을 제안했고 우리 반 학생들은 모두 월리스 컬렉션으로 향했다. 월리스 컬렉션이 어떤 곳인지 사전 정보가 1도 없는 상태에서 '갤러리'라는 단어에 반색해 따라나선 곳은 시내 중심가이고 어학원에서도 멀지 않은 본드스트리트에 있었다. 분명 갤러리라고 했는데 도착하고 보니 누군가의 집 앞이라는 게 좀 의외였다. 


하지만, 한 발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마무시하게 많은 전시작품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 모아둔 예술 작품들만 놓고 보자면 어지간한 미술관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손색없는 곳인데 더 놀라운 사실은 월리서 컬렉션은 개인이 모은 소장품이라는 점이다. 하트퍼드(Herford) 후작 가문이 무려 5대에 걸쳐 모았다는 약 5,500여 점의 작품들의 면면만으로도 얼마나 유력한 가문이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5번째 후작이었던 월리스 경이 유언으로 가문의 모든 컬렉션과 저택을 국가에 기증을 했기에 현재 월리스 컬렉션은 국립 미술관으로 운영 중이다.  

'고급지다'는 단어가 절로 떠오르던 월리스 컬렉션 


런던 외에도 유럽의 다양한 나라의 작품들이 있고 로코코 컬렉션이 수준급이라는 평가가 있는 만큼 엄청난 로코코 스타일의 작품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시녀들'에 그려진 마르가리타 공주(Margarita Teresa)의 초상도 있고 유명한 작품들은 숨은 그림을 찾아내듯 발견해 내는 즐거움이 있는 곳이었다. 

마르가리타 공주를 여기서 만날 줄은


다만 아쉬운 점은 작품이 너무 많아 치이는 느낌이었다. 그냥 두서없이 벽에 죄다 다 걸어 놓은 느낌이랄까. 작품에 대해서 잘 모르고 초심자라면 처음 몇 군데는 열심히 보겠지만 나중에는 너무 많은 작품에 치어서 대충보기 십상이었다. 간혹 '저 그림은 아는 그림인데' 싶어 좀 자세히 보고 싶어도 너무 위쪽에 걸려 있어 그림을 제대로 보기 힘들기도 했다. 관람자를 배려한 작품 디스플레이는 아니었다. 

로코코 풍 작품은 질리도록 보게 될 것이다.
세인트 폴과 빅벤이 한 프레임 안에 


월리스 컬렉션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1층을 모두 할애한 무기와 갑옷 컬렉션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세계 최고의 컬렉션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유럽뿐 아니라 이슬람 등 다른 문명의 전생사에나 등장할 무기와 갑옷은 입기 위한 용도일까 의심이 들 정도로 예술 작품을 능가하는 것도 여럿 있었다. 그 연장선 상에서 말들에게까지 갑옷을 입힌 극도의 사치는 과연 전쟁의 목적이었을까 의구심이 들게 했다. 나중에 어학원에서 이 갤러리를 본 소감을 말하는데 남자들은 전부다 무기와 갑옷 이야기를 했고 여자들은 로코코 그림에 관한 이야기로 극명하게 갈렸다. 혹자는 1층 때문에 이곳을 찾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런던을 방문한다면 월리스 컬렉션도 꼭 리스트에 넣기를 바란다.  그게 무엇이건 그대들이 기대했던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틀림없이. 

1층 모두를 할애한 무기, 갑옥 컬렉션
아무리 봐도 실전용은 아닐 것 같단 말이지. 
1층에 위치한 프랑스 레스토랑 '월리스'는 18세기 런던 상류층의 분위기를 풍긴다.


켄우드 하우스(Kenwood house) 


영화 '노팅힐'에서 여자 주인공인 줄리아로버츠가 시대극을 촬영하는 장소에 등장했던 곳은 바로 켄우드 하우스이다. 켄우드 하우스는 햄프스테드 히스(Hampstead Heath)라는 런던 북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런던 시내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영화 '노팅힐'의 촬영장소가 궁금한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볼거리 많은 런던에서 이곳까지 부러 잘 찾아오지는 않는다. 


다른 갤러리에 비해 규모도, 소장된 작품도 매우 적은 곳이지만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그림이 있기에 미술애호가들은 먼 거리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 그림은 바로 렘브란트의 '두 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과 베르메르의 '기타 연주자'이다. 이 두 그림은 어떤 책에 영국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하는 100가지의 그림에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니 미술에 관심이 많다면 켄우드 하우스도 놓치지 말자. 

영화 '노팅힐'이 촬영된 켄우드 하우스 
렘브란트 말년의 모습을 담은 두 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 
'진주목걸이'로 유명한 베르메르(Johannes Vermeer)의 '기타 연주자' 



덧. 개인적으로는 런던에 있는 동안 가장 많이 갔던 곳이 켄우드 하우스가 있는 햄프스테드 히스다. 켄우드 하우스 안의 그림이 아니어도 충분히 머물만한 가치가 있는 햄프스테드 히스였다. 


+ 런던 시크릿 여행지 : 켄우드 하우스와 더힐가든 앤드 퍼골라, 

https://brunch.co.kr/@haekyoung/200


+ 햄프스테드 히스 



+ 다음 이야기 :  런던 현지인들과 템즈강 트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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