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면이지만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빠르다는 것. 가끔은 투움바 라면처럼 쉽고 빠른 음식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대부분의 빠름에는 어딘가 무서운 면이 있다. 신속하게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리다가도 그 사이에 못 본 체 했던 수많은 감정들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다. 조기 유학, 사전 예약, 예약 판매, 선입금 같은 단어들은 어쩌면 원숭이 엉덩이는 빨갛고 빨간 사과는 맛있고 맛있는 바나나처럼 긴 기차만큼 빠른 것이 아닐지. 이런 말장난만큼 생각보다 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지.
인생에 있어서도 쉽고 빠른 길이 있을까? 있다면 선택하는 게 옳을까? 연초엔 여러모로 고민이 많아 친구에게 용하다는 곳을 소개받았다. 자미두수라는 고대 중국의 역술을 보는 곳이었는데 나는 여기서 충격에 가까운 결과를 마주했다. 갑자기 결혼을 하라는 거였다. 그것 말고는 이런저런 복도 딱히 없는 그저 그런 인생이라고. (슬프지만 생각해보니 맞는 것 같다) 지난해 집 문제로 힘들었던 것도 맞췄고, 집운도 없다며...(아, 내 인생!) 그저 그래서 힘들 수 있지만 결혼을 하면 배우자도 나도 잘 풀릴 것이라고. 회사 체질도 아니지만(듣다 보니 맞는 것 같잖아) 성공하는 사장님이 될 수 있다고도 했다. (이렇게 우유부단한 사람이 사장님이 된다고?) 사주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이런 얘기는 처음이라 다시 묻고 또 묻고... 혼란 한 스푼, 궁금증 두 스푼, 의심 세 스푼을 섞어 질문을 쏟아냈다.
- 선생님, 저는 직장운이나 금전운이 궁금한데요. 그런 운은 전혀 없나요?
- 없다니까 왜 자꾸 물으실까. 봐, 원래 이 사주가 의심도 이렇게나 많다고.
역술가는 아이패드로 역술 결과를 요약한 프로그램을 이리저리 보여주며 말했다. 언젠가부터 반말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느슨한 표정과 몸짓으로. 한문이 가득한 화면은 봐도 알 턱이 없었다. 그저 순탄하지 못한 부모님의 결혼 생활을 지켜보며 자랐기에 결혼하면 불행뿐, 비혼만이 답이라고 생각해왔던 나에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이게 맞는 것 같아 정답지를 봤는데 후보로 고민했던 것도 아닌 처음부터 아니라고 생각했던 선택지가 답인 느낌이었다.
게다가 사람까지 점지해줬다. 내 사주를 보는 순간 어떤 사람의 사주가 떠올랐다며 옆에 놓인 종이 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는데, 생각했던 그 사람이 마침 나와 천생연분이고 그게 이곳을 소개해준 친구의 친구라면…. 믿기 어렵겠지만 이 모든 게 사실이다. 역술가는 이런 경우는 만 쌍 중의 한 쌍 정도의 확률이라며, 그 사람이 아주 남자답고 괜찮다느니, 전화를 해주겠다느니 신나서 날뛰었다. 아니 놀랍긴 한데 잠깐만, 나 이렇게 결혼해? 이 기세라면 당장 다음 주에 결혼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듣다 보니 그 사람도 나도 인생이 풀린다는데 이거 눈 딱 감고 계약 결혼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 안녕하세요. 초면에 죄송하지만 당신과 나, 둘의 성공적인 삶을 위해 저와 결혼을 하시겠습니까?
- 뭐래, 미쳤나봐.
아마도 이런 반응이 오겠지.
오늘 복비는 안 줘도 된다, 둘이 결혼하게 되면 한복이나 하나 해주라는 역술가의 말에 나는 힘주어 사회적 미소를 유지한 채 계좌번호를 물었고 입금을 완료했다.
역술가는 마지막까지 이제 인생의 지름길을 타기만 하면 된다며 일단 만나서 얘기라도 해보라, 그럼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밑져야… 본전이겠지…? 결국 나는 흔들리고 말았고 다음 날 친구와 그 사람의 식당에 방문하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도 이뤄진 게 없었다. 하필 그날 식당은 바빠 말 한 마디 나누기 힘들었고, 이 얘기를 듣고 나만 믿으라던 친구는 어찌 된 이유에선지 그 뒤로 별다른 말이 없었다. 아, 계약 결혼에 대해 건의라도 해보면 좋겠습니다만, 내동 비혼을 외치다 갑자기 점괘를 보고 결혼에 드릉드릉하는 사람이라니. 내가 보기에도 어이가 없어 조용히 지나갔다.
이 얘기를 듣고 동료 몇은 신기하다며 그 역술가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동료들에게 결혼 여부를 묻더니 자꾸 애를 낳아라, 운전을 하지 말아라, 일을 하지 말아라, 흑염소를 먹어라… 는 등의 다소 빻은 조언만을 했다고 한다. 둘은 전혀 다른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거의 비슷한 처방을 내렸다고. 이들이 궁금해했던 직장운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생각해보면 그렇다. 이 역술이 중국 고대, 그러니까 거북이 등딱지에 문자를 새겨 넣던 시절에 생겨났다는 사실을 상기했어야 했다. 여성에게 결혼하고 애를 낳고 기르는 것 말곤 좋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던 시절이다. 현재는 21세기고 구시대보다 초구시대의 이야기를 지금을 사는 여자들에게 욱여넣고 있었으니, 말이 될 리가 있을까. 개정이 한참은 필요한 정답지였다. 애초에 정답지일지도 미지수였다.
잠시 알지 못하는 누군가와 결혼해 부귀영화를 누리는 미래를 상상하던 나는 파사삭, 식어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인생에 지름길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정말 그런 게 있을까? 있다면 세상 사람들 모두 자미두수를 점쳐서 복비 내고 잘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용한 것 치곤 자미두수 스튜디오가 너무나 한가했던 것이 떠오른다) 이런 얘기를 적다 보니, 오래 전 방영했던 드라마 속 대사가 떠오른다.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가야하는 산이 있대. 그 산엔 커다란 나무가 하나 있는데, 그 나무엔, 세상 모든 사람의 이름이 써있는 쪽지가 열매처럼 걸려있대. 죽어서 그 나무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에게 나무 옆 저승사자가 이렇게 말한대.
“지금껏 니가 부러워했던 니가 바라던 삶을 사는 사람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골라 읽어라. 읽고 나서도 그 사람이 부러우면 그 쪽지를 가지고 산을 내려가라. 그럼 너는 다시 태어날 때 그의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그 쪽지엔 그들의 삶이 낱낱이 적혀있지. 하지만 정작 그 쪽지를 펴고 읽은 사람들은 그렇게 부러워했던 다른 이의 삶을 택하지 않고, 결국 자기 이름이 써있는 쪽지를 가지고 내려가.
내 삶만 힘들다고 징징대다가 남이 어떻게 사는지 알면 차라리 내가 낫구나 인생이 다 그런거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거지. <KBS 수목드라마, 굿바이 솔로, 2006 中 >
남들의 생이 부럽고 좋아보여도 막상 선택지가 주어지고 하나씩 까발렸을 때 결국 나의 삶을 택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 순간마다 찾아올 수많은 선택이 어찌됐든 최선이다. 그러니 그 인생을 껴안고 잘 살아가라….
풍족한 유대와 사랑을 받고 자라 어딘가 꼬인 면이 없고 거침 없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며 야망도 있고 능력도 있고 남에 대한 배려도 할 줄 알고 동물을 사랑하며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삶…!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지금 순간 살아보지 못한 누군가의 삶을 쓰면서도 부러워하게 되네. 정신 차려!) 이런 선택지라면 당장 쪽지를 들고 튀어 내려가겠지만… 그럴 수 없기에 나는 이러 저러한 이유를 가지고 최선의 나를 살아가는 중이다.
돈을 덜 벌더라도, 남들을 뭉개면서까지 올라가고 싶진 않다. 귀찮더라도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고 싶지 않고, 기름진 맛을 포기한들 동물을 죽이고 그 살을 씹으며 살고 싶지는 않다. 뭐 이런 이유들. 답답하고 느린 인생이지만 나름의 기쁨과 슬픔을 챙겨 담고 이고 지며 나아가고 있다.
생각해보니 드라마 속 이야기와 비슷한 질문을 역술가에게도 했었다.
- 선생님, 그런데 이렇게 인생의 답을 알려주면 모든 사람이 잘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 그렇지, 그런데 사람들이 알려줘도 잘 안해. 그래서 다들 그렇게 사는 거야.
자미두수를 보러 가는 대신 드라마 한 편을 더 볼 걸 그랬나 싶다. 아이고, 내 인생 어디로 가려나. 얼마나 맛있어지려나. 불지 않게 잘 끓일 수 있으려나. 겁나 궁금하고, 사실 겁이 나게 궁금하다. 다만 분명한 건, 쉽고 빠르다는 말은 라면 끓일 때나 써야 한다는 것과 적어도 내가 먹을 라면 하나는 잘 끓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일이 있고 한참이 지나 친구와 만났던 날, 잘 보는 사주집이 근처에 있다고 말해주었을 때 나는 그 돈으로 맛있는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말했다.
비건 투움바 라면 레시피
풀무원 정면 1봉, 마늘 5~7알, 양파 1/4, 버섯(없어도 됨), 브로콜리, 두유(원하는 농도만큼)
1. 면을 삶을 물을 올리고, 들어갈 야채를 손질하고 자른다.
2. 팬에 양파와 마늘을 넣어 먼저 볶다가 양파가 투명해지기 시작하면 버섯도 함께 넣고 볶는다.
3. 물이 끓는다면 면을 넣고 3분 30초 정도만 삶아준다.
4. 2에 라면 스프를 넣고 살짝 볶아주다 두유를 넣는다.
5. 건진 면을 4에 넣고 소스가 잘 묻도록 저어준 뒤 그릇에 담아내면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