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으로 그리워하는 일
이런 사건과 저런 상황으로 인해 전혀 다른 지역에서 자리를 잡고 퍼져나가는 음식이 있다. 한국만 해도 흥남 철수 이후 피난민들이 구하기 어려운 메밀로 만드는 '평양냉면' 대신 미국이 원조한 밀가루 포대를 가져다 만든 ‘부산 밀면’이 그럴 것이고, 오늘날 미국 음식을 대표하는 갈래인 '소울푸드'는 가혹했던 남부의 삶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고 사랑했던 기억을 그리워하면서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움에 기인한 음식. 음식으로 그리워하는 일. 힘들었던 시기를 함께 난 음식의 힘, 그 동지애는 놀랍도록 오래 지속된다.
보통 미트 소스 파스타의 ‘미트 소스’를 담당하는 라구 알라 볼로네제 (ragu alla bolognese) 역시 그렇다. 다진 고기와 야채, 토마토를 오랜 시간 끓여서 만든 소스다. 이름부터 '볼로냐(Bologna)의 라구 요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만 봐도 이탈리아 볼로냐 지역에서 시작된 음식일 거란 추측으로 자연스레 넘어가지만, 사실 언제 어디서부터 만들어먹기 시작했는지는 추정만 할 뿐 정확하진 않다고 한다. 오히려 미국과 영국에서 대중적인 요리로 굳어졌다. 특히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고깃값이 저렴했던 미국에서 이탈리아 이민자들에 의해 자주 요리되고 사랑받았던 음식이다. 시간이 지나고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며 ‘케첩 스파게티’라는 간소화된 형태로, 일본에선 ‘나폴리탄 스파게티’라는 이름으로 재탄생되기도 했다.
어렸을 때 비슷한 음식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원형으로 했을 엄마의 파스타였다. 양파와 햄을 잘게 다져 볶아 케첩 가득 넣고 볶아낸 야매 라구 소스는 피자로도 탄생했다. 케첩의 자취가 너무 커서 이름도, 조리법도 다른 두 요리가 같은 맛을 띄곤 했는데, 나와 동생에겐 평소와는 다른 요리를 맛보는 이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라면이나 피자, 햄버거, 치킨 등의 패스트푸드는 몸에 좋지 않기 때문에 건강을 위해 삼가야 한다.'는 엄마의 신조 때문이다. 오죽하면 우리 가족 사이에선 '라면 먹는 날이 생일'이라는 관용구가 통용될 정도였다.
"싱싱아, 마트 가가꼬 피자 그거 사 와잉."
피자를 먹는 날, 심부름 담당은 나였다. 시장에 있는 마트에 가면 늘 안쪽 우유 코너 옆자리에 피자 도우 믹스와 모차렐라 치즈가 함께 들어있는 피자 키트가 있었다. 그걸 사 오면 엄마는 야무지게 반죽을 치대어 팬 위에 펼친 뒤 야매 라구 소스를 바르고 햄과 피망, 모차렐라 치즈를 얹어 구웠다. 넣었던 재료가 그대로 느껴지는 요령 없이 다소 투박한 맛이었지만 특별했다.
그런데 이제 와 문득, 엄마가 패스트푸드 금지령을 내렸던 건 어쩌면 표면상의 이유만이 다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우리 집 상황을 그려본다. 딸 넷. 위로는 재수생과 고3 수험생, 아래는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이 있었다. 꽤 오랜 기간 개인택시를 하다 레미콘을 시작한 아빠는 한동안 순탄하게 회사생활을 했지만 순탄치 못했던 회사는 어느 날 갑자기 부도를 맞았다. 그는 그 와중에 누군가의 보증을 서 왔고, 먹을 과일도 없는데 누군가의 말에 이끌려 과일에 묻은 농약 성분을 씻어준다는 가전제품을 사 와서 아내를 속상하게 했다. 성실하고도 타인에겐 친절한, 그래서 가족들을 힘들게 했던 아빠였다.
언니들은 각각 노량진과 외고 기숙사에서 수능을 준비했기에 이런 상황을 알지 못했을 거다. 대신 초딩이었던 나와 나보다 더 어린 동생은 이런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다. 유독 먹성도 좋고 욕심도 많았던 막내는 이것도, 또 저것도 먹고 싶다는 말을 해맑게 뱉곤 했다. 그럼 나도 눈치를 슬슬 보며 옆에서 거들었다. 그런 애들 앞에서 해줄 수 있는 건 ‘건강을 위해서’라는 핑계뿐이었을 거다. 아니 핑계나 거짓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을 거다. 당장 전화 한 통이면 눈 앞으로 오는 것들을 뒤로하고 해 줄 수 없었던 마음은 어땠을까.
지금은 가끔 연락해야 좋은, 삼일 이상 집에 머물게 되면 무조건 싸우게 되는 엄마이지만, 이때를 생각하면 고마움과 안쓰러움, 그리고 어떤 동지애를 느끼게 된다. 집에 대해선 그리운 기억도 있지만 그립지 않은 기억도 많다. 잊고 싶은 기억들이 겨우 희미해질 때쯤 어째서인지 이 맛이 기억 속에서 불쑥 얼굴을 드러냈다. 그리지 않아도 깊이 남아있는 내 집, 고향, 기억들, 가족, 지긋지긋하고 사랑하는 것들.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들. 애증과 동지애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것들. 그런 것을 떠올리며 지난 크리스마스엔 비건 볼로네제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케첩으로 다소 유치한 맛을 내고 비싼 비건 치즈를 잔뜩 올려 사치스럽게. 크리스마스엔 왠지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비건 볼로네제 파스타 레시피
파스타면 1인분(링귀니 사용), 바이오 라이프 비건 슬라이스 치즈 2장, 두부 1/3모, 양파 1/4개, 토마토 4개, 포미 스트레인드 토마토소스, 케첩, 소금, 후추
1. 팔팔 끓는 물에 소금 1스푼과 올리브유 한 스푼을 둘러주고 파스타면을 넣어 익힌다. 이때 팬에서 소스와 버무릴 것을 고려해 완전히 익히는 것보다는 살짝 덜 익혀주는 것이 좋다.
2. 그 사이에 양파와 토마토, 치즈를 잘게 썰어준다.
3.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양파를 넣고 볶다 양파가 투명해지면 두부 1/3모를 으깨어 넣은 뒤 함께 볶는다. 으깬 두부로 라구 느낌을 내어줄 예정이다.
4. 여기에 소금과 후추를 넣어주고 토마토도 같이 넣어 볶아준다.
5. 포미 토마토소스 1/2팩, 케첩 3스푼 정도 넣어준다.
6. 소스가 완성될 즈음엔 면도 다 익어있다. 익힌 면을 넣고 잘 섞어준다. 소스가 너무 졸아들었다면 면수로 농도를 조절한다.
7. 썰어둔 치즈를 수북하게 올리고 전자레인지로 직행시킨다. 치즈가 녹았다면, 파슬리를 톡톡 뿌려 마무리.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