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꿀 수 없을 것 같더라도
'머리카락도, 시간도 그냥 두면 자라고 지나가는데 뭘.'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는지, 가슴까지 오는지가 대화의 화두가 되던 시절에도, 매년 연말이 다가올 때마다 바뀔 나이가 억울하다는 듯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도 저는 다소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에 마음을 쓰는 게 조금 이상하고 아깝게 느껴졌거든요.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비슷한 얘기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
"벌써 올해 끝인 거.. 실화야?"
이번엔 좀 달랐어요. 여기엔 놀라움도, 아쉬움도, 때론 두려움과 걱정도 섞여 있었습니다. 2020년은 여느 때와는 다른 해였기 때문입니다. 서로 만날 수 없음에 아쉬워하다 어렵게 어렵게 만나면 몇 배는 더 반가워하고, 소중함을 느끼고, 그런 덕에 혼자만의 시간도 많아졌던 것 같습니다. 마음을 챙길 정신이 있다니 재수가 좋았습니다. 어렵게 쌓아온 커리어가 통째로 흔들리는 친구들을 보면서 혹여 위로마저 상처가 되진 않을까 주저하던 날도 많았습니다. 내일 뭘 입을지 고민하는 것 대신 내일 뭘 먹어야 할지 걱정해야 하는 시기를 보내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사이 제 머리카락은 벌써 어깨춤을 조금 넘었습니다. 이년 가까이 숏컷을 고수했는데, 연초부터는 자르기를 멈췄거든요. 6개월간 두 번의 이사를 준비하느라 모든 게 지쳐있는 상태였고 지저분해 보이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습니다. 빨리 끝이 났으면 싶었어요. 바라던 이사를 하고 나니 한동안은 나사가 한두 개 풀린 사람처럼 지냈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채식을 시작했죠. 해보니 너무 좋더라고요. 마음 편히 밥 먹을 수 있고, 어렵지도 않고요. 지구에 그나마 덜 해로운 개체가 된 기분이랄까요. 지난 한 해 동안의 가장 큰 소득입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지난해가 되었군요.
"희망과 기대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어요. 처음에는 그저 지속되는 시간에서만 차이가 있는 줄 알았죠. 희망이 좀 더 멀리 있는 일을 기다리는 거라고 말이에요.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요. 기대는 몸이 하는 거고 희망은 영혼이 하는 거였어요. 그게 차이점이랍니다. 그 둘은 서로 교류하고, 서로를 자극하고 달래주지만 각자 꾸는 꿈은 달라요. 내가 알게 된 건 그뿐이 아니에요. 몸이 하는 기대도 그 어떤 희망만큼 오래 지속될 수 있어요. 당신을 기다리는 나의 기대처럼요." <A가 X에게, 존 버거>
볕이 좋았던 가을날에 읽은 책입니다. 아이다라는 여인이 감옥에 있는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담은 소설이죠. 어떤 게 먼저 쓴 편지인지 시간 순서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작가는 감옥에서 발견된 편지 더미를 우연히 발견했고 그저 전달할 뿐이니까요. 처음엔 언제 썼던 편지일까 궁금해 하다 차차 깨닫게 됩니다. 이들의 대화에 시간 순서는 크게 의미가 없다는 것을요. 때문에 읽는 내내 영화 <컨택트(Arrival), 2016> 속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등하게 연결하는 언어인 ‘헵타포드어’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문득 이 구절이 떠오른 건 한 해의 끝에 서니 '몸이 하는 기대'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더는 고기를 먹지 않는 일. 누군가의 고통 없이도 즐거운 식사. 선택으로 살릴 수 있는 생명. 내 몸으로 바꿀 수 있는 세상. '몸으로 하는 기대'였습니다. 공장식 축산과 환경 파괴로 인해 생겨난 팬데믹에서 이건 최선이자 불가피한 선택이었어요. 사랑하는 강아지와 친구들과 고통받는 동물들을 생각한다면 더더욱요.
늘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는 겁쟁이였던 이제 저는 식사를 만들고, 더 많은 사람에게 닿을 수 있도록 SNS에 올리고, 친구들을 초대해 이를 나눕니다. 바꿀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지는 것들에 마음 쓰는 일을 이상하다 생각하는 대신 변화될 순간을 매일 기대하며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새해에도 지속하려 합니다. 결심을 담아 1월 1일엔 비건 떡만둣국을 만들었어요.
- 1월 1일 씀.
비건 떡만둣국 레시피
다시마 2-3장, 표고버섯 4개, 이노센트 비건 만두 오리지널 2팩, 떡국 떡 약 300g, 파 맘대로, 연두 1-2스푼, 소금 약간 (3인분 기준)
1. 표고버섯을 얇게 썰어낸 다음 다시마와 함께 물에 넣고 한소끔 끓여 채수를 만든다.
2. 흐르는 물에 떡을 씻어주고 붙어있는 떡들도 떼어준 다음 만두와 함께 끓는 채수에 넣는다. 만두를 너무 오래 끓이면 터지니, 적당히, 적당히 끓여야 한다. 만두를 나중에 넣어도 좋다.
3. 파를 먹고 싶은 만큼 넣어준 뒤, 연두를 취향에 맞게 넣어주면 된다. 난 큰 숟가락으로 한 스푼 가득 넣고, 소금 약간 뿌렸더니 간이 딱 좋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