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먹이고 살리는 일
본가를 떠나 살아온 시간이 도합 4년, 직접 밥을 지어 먹기 시작한 건 최근 들어서다. 지난해부터 채식인이 되기로 마음 먹었고, 연말부터는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 집에서 밥을 먹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매일 끼니를 직접 만들고 챙기는 일이 이제 제법 손에 익어간다.
그런 사람치곤 '대체 전엔 뭘 먹고살았나' 싶을 만큼 먹는 것을 소홀히 했다. 물론 굶은 건 전혀 아니다. 뱃살이 뒤룩뒤룩 불어나 바지가 아슬하게 잠기도록 많이 먹었지만, 식사의 질은 턱 없이 낮았다. 이전까지 내게 '식사'는 최대한 아껴야 하는 카테고리였다. 정확하게는 밖에선 즐기고, 집에 돌아와선 포기해야 하는 것. 졸업 후 매거진 어시스턴트를 시작하면서 주어지는 월 60만 원의 돈은 월세를 내고 나면 반도 남지 않는 금액이었다. 부모님은 나의 상경을 탐탁지 않아했고 그러니 지원해줄 리 없었고 그런 부모님을 졸라서까지 도움 받고 싶지 않았다. 몇 달간 투-쓰리잡을 뛰며 모은 돈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교통비를 아끼겠다며 논현동 회사 근처에 어떻게 어떻게 고시원 방을 얻었는데, 문제는 물가가 실로 어마 무시했다는 거다. 현실감 떨어지는 논현동 집값보다 무서운 건 당장의, 매일의 점심 밥값이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선배들과 함께 근처 식당으로 향했는데 예쁘고 정갈하게 담긴 밥만큼이나 가격표엔 0이 정갈하게 붙어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의 임대료가 0의 개수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는 걸 알지만, 예쁜 것도 알겠고 맛도 좀 있는 것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 한동안 납득되지 않았다. 비싼 밥이니 남김없이 다 먹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선배들이 너무 높게만 보였고 어려운 자리에선 밥이 제대로 들어갈 리 없었다. 밥 반공기를 겨우 먹었다. 점심시간마다 해결할 수 없는 걱정을 했다. '가끔 6천 원짜리 순두부 집도 가면 좋겠는데···.', '어째서 선배들은 만원은 그냥 넘어가는 밥을 매일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걸까?'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카드를 긁었다. 많이 못 먹어본 티, 취향이 없는 티, 가난한 티가 날까 봐 더 열심히 긁었다. 그리고 이는 모두 사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나 싶지만 회사에 다니는 내내 고시원에 산다는 사실을 숨겼다. 시간이 지나 알게 된 선배들은 따뜻하고 선한 사람들이었지만, 당시엔 매거진은 보여지는 것이 거의 전부인 세계라 생각했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라 넘겨짚고 경계했다. 모르는 세계 초입에 들어선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조심조심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저녁엔 주로 고시원 주방 싱크대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열라면을 끓여 먹었다. 밥과 김치, 라면 무한 제공은 고시원이 가진 몇 안 되는 장점이었다. 과자가 먹고 싶을 땐 열라면을 뿌셔 먹었다. 요리란 걸 하고 싶지 않게 생긴 주방이긴 했다. 주방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를 틈 타 재빨리 라면을 끓여 방으로 왔다. 언제 누가 올지 모르는 공간에서 누군가에게 ‘배고프다’는 상태와 ‘먹고 싶다’는 의욕을 내비치며 직접 요리까지 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일은 치부를 들키는 것만 같았다. 그래 봤자 비슷한 모양의 치부를 가졌을 테지만 말이다.
4평짜리 신길동 오피스텔로 이사 오고 나서는 생활이 조금 나아졌다. 창문 없는 방에서 밤낮 분간을 못하다가 눈부심을 느끼며 잠에서 깰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찬 변화였다. 여전히 적지만 100만 원 남짓하는 월급을 받게 되었고, 공유하지 않아도 되는 화장실과 모르는 이에게 배고픔을 들키지 않아도 되는 주방도 생겼다. 거기서 자주 만들었던 음식은 파스타였다. 삶은 면에 크림 아니면 토마토소스를 넣으면 만들 수 있는 초초 간단한 요리니까. 그보다 더 자주 먹었던 건 과자와 맥주다. 오피스텔 일층에 자리한 세븐일레븐에서 4캔에 만원 세계 맥주와 과자 한 봉지를 사 와 먹으면 그게 저녁이었다. 가끔은 피자나 치킨을 시켰는데 그때 내가 레귤러 사이즈 피자 한 판을, 치킨 한 마리를 앉은자리에서 해치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점심엔 반공기도 못 먹으면서 그랬다. 분명 배가 부른 건 맞는데, 집에 오면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졌다.
작고 하얀 집에서의 시간은 생각보다 금방 지나갔다. 그사이 나는 고단하고 즐거웠던 어시 생활을 끝내고 진짜 회사원이 되었다. '이제 1.5룸으로 등업 하리라' 하는 다짐과 함께 욕심을 부렸다. 적당한 가격에 괜찮은 집을 찾아 군자, 자양, 건대입구, 신대방, 관악, 동작을 지나 녹번동까지 왔다. 애초에 실버주택으로 지어졌지만, 비싼 가격 탓에 입주자가 없자 경매로 넘어가서 완전히 다른 법인체가 소유하고 있는 건물이 있었다. 예산보다 살짝 무리한 금액이긴 했지만 16평에 1.5룸, 베란다와 풀옵션까지 달렸던 퀄리티 빵빵한 그 집을 보자 눈이 돌았다. 소파와 테이블을 놓고 햇빛을 맞으며 브런치를 즐기는 앞날이 막 그려졌다. 그때 깨달았어야 했다. 그 집은 중소기업청년 대출이 불가한 '노인복지시설'이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보증보험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혹시라도 법인이 망하면 평생 일해도 쥐어보지 못할 돈을 날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임대인이 자꾸 말을 바꿀 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는 관리비 지원, 별도 보증비 지원 등의 조건을 계속해서 제시했다. 언제 어디서든 말이 많은 사람은 의심해야 하는데 집에 눈이 멀어 신용 대출을 받고, 전세 대출을 또 받고, 행원이 금리 우대가 되는 신용 카드를 추천하길래 처음으로 신용 카드란 걸 만들고···. 신용 등급이 하루하루 뚝뚝뚝 떨어졌다. 그제야 아, 뭔가 잘못되었다 싶어 임대인과 죽기 살기로 싸웠고 계약서를 세 번이나 다시 써가며 세 달만 살고 나가는 조건으로 겨우 합의를 보았다. 많이 울었고 외로웠다. 맞아, 여기 눈 뜨고 코 베인다는 서울이었지. 세 달이 지나면 떠나야 했기에 박스도 풀지 못한 채 살았지만, 바깥 풍경은 야속하게 아름다웠고 주방과 냉장고는 널따랗고 고급스럽고 좋았다. 내 것이 아니지만 사는 동안에는 이것들을 누려야 조금이라도 덜 억울할 것 같았다.
어느 날은 채식을 시작한 동생이 집에 놀러 왔다. 평소 같으면 배달 음식을 주문했겠지만, 꿀도 거부하는 동생이라 별 다른 도리 없이 요리 같은 요리를 해보기로 했다. 바람은 쌀쌀한데 공기에선 봄 냄새가 났던 때라 참나물이 좋아보였다. 그걸로 겉절이를 만들었는데, 우린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매실액, 고춧가루, 참기름 등을 더하고 더하다 보니 집에서 엄마가 해주던 맛이 났기 때문이다. 지방 탈출이 기뻤다면 기뻤지 그립던 적은 거의 없다. 대신 겉절이가 미치게 먹고 싶던 날은 있었다. 날고 긴다는 맛집에 가서도 그 맛은 찾을 수 없어 늘 아쉬워했는데 이렇게 쉽게 가능했던 거였다. 허무하기까지 했다. 그냥 만들면 되는 거였다니! 좁아터진 소도시가 품었던 것 중 유일하게 그리운 게 맛이라니! 말투까지 바꾸며 서울 사람인 척하고 있지만 더듬더듬 찾아 만든 게 지긋지긋했던 고향의 맛이라니!
우린 정말 맛있게 식사를 했다. 그러고 나니 만들어 먹는 것도 꽤 괜찮은 일 같았다. 한 번이 어렵지 두세 번은 쉬웠다. 서툴렀지만 자꾸 해보니 이거 좀 재미있기도 했다. 무엇보다 상황이 나를 바꾸게 하고 싶지 않았다. 순순히 흔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서울에 올라온 뒤 숱하게 초라하고 찌질했던 순간들을 견딜 수 있었던 건 내 힘으로 나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스스로를 먹이고 입히고 재울 수 있다는 사실은 꽤나 큰 위로이자 희망이었다. 한동안 이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래,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세끼 밥 잘 챙겨 먹으면서, 건강하게 나를 돌보자. 외로워도 슬퍼도 울면서 밥을 먹으리라. 그래서 집주인과 싸워 이기고 이삿짐도 씩씩하게 날라보리라, 마음먹었다.
눈 덮인 풍경이 분홍 팝콘으로 뒤덮이는 사이 나는 망원동으로 이사를 했다. 체리 몰딩에 눈을 뗄 수 없지만 그런대로 아늑하고 널따란 방이었다. 이사를 오던 날, 텅 빈 방 베란다에서 맑고 깨끗한 햇살이 쬐는 동네를 바라보며 여기서는 왠지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집에서 본격적으로 채식을 시작했다. 이슬아 작가의 작품 <심신단련> 속 「새로운 우리」를 읽은 것을 계기로 조금씩 실천하다가, 그 속에서 언급하는 김한민 작가의 <아무튼 비건>을 읽으며 아예 쐐기를 박았다. 마침 자주 듣는 팟캐스트인 <듣. 똑. 라>에서 '원헬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덕분에 채식 라이프를 어렵지 않게 차근히 익힐 수 있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기쁘게도 망원동은 채식 식당이 많아 채식인에겐 성지처럼 여겨지는 동네다. 바로 옆 망원시장엔 '어째서 저렇게 싸게 팔 수 있지?' 생각할 만큼 저렴하고 신선한 과일과 채소가 가득하다. 덕분에 나는 매일 즐겁게 장을 보고, 채소를 손질하고, 사각사각 썰다 보면 어느새 그 소릴 듣고 와있는 강아지와 채소를 나눠 먹는다. 아그작, 아그작, 아그작.
하루를 보내면서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아마도 '오늘은 뭐 먹지?'가 아닐까 싶다.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고르듯 메뉴를 신중하게, 천천히 고르고 레시피를 궁리한다. 마땅한 재료가 없다면 집에 있는 채소를 활용하고 동물이 있던 자리에 식물성 재료를 넣어본다. 거기에 간을 하고 향신료를 더하고 섞다 보면 얼추 채식 이전에 먹었던 요리의 맛이 재현되는데, 그게 그렇게 신기하고 기쁘다.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식사 한 끼를 나누는 것이 되었고.
언젠가 엄마는 '먹는 것으로 조지는 돈이 제일 아깝다'라고 했고, 난 '먹는 것'을 써서 돈을 버는 사람이 되었고, 채식을 하고부턴 '먹다'라는 단어와 행위는 내게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되었다. 그러니 기록하려 한다. 별 것이 아닌 게 아니니까. 평생 할 거니까. 매일 지글지글 볶아낸 이야기를 싸묵싸묵 적겠다. 배고플 때 쓱쓱 넘기며 찾아볼 나의 요리 수첩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