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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셸 오 May 16. 2024

죄란 무엇인가 -시기심이라는 죄-

마크존스

마크존스의 이 책은 인간의 죄에 대한 것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어서 저자의 말처럼 계속 읽어나가려면 불편할 수도 있다.

난 이 책을 첫 장부터 읽다가 앞엣 부분은 내가 어느 정도 인지하는 것이어서 목차의 12번째. '시기심이라는 죄에 대하여' 파트를 집중해 읽었다. 인간이 경쟁에서 이기려고 상대방을 질투하는 것은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지만 여기에서는 자신에게도 해롭고 상대방에게도 해롭게 하는 시기심이라는 죄악에 대하여 깊게 파헤치고 있다.

살면서 질투를 안 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시기심을 가진다는 주장에 공감이 많이 되었다. 난 학원을 해 왔기 때문에 학원들끼리의 시기나 경쟁은 했었지만 나와 다른 직업군에 대해서는 질투를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상대방을 시기질투할 때 내가 얼마나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는지 오래전에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는 질투라는 개념조차 내겐 희미한 추억일 뿐이다.

다만 나를 질투했던 사람들의 시기심이 나를 곤경에 빠뜨렸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런 에서 본다면 시기로 인하여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결국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불법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저자는 타인에 대한 시기는 자신의 열등감에서 비록 한다고 주장한다.

 어릴 때  나의 동그란 얼굴을 호떡이라고 계속 놀리는 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정말 호떡처럼 둥글넓적한 얼굴인가 싶어서 우울한 적도 있었다. 그것도 늘 같이 다니던 친구 중 한 명이 그랬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친구는 코 옆에 커다란 검은 점이 있었는데 자신의 얼굴에 열등감이 있었서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른이 되어서는 학원이 성수기를 맞았을 때 주변 학원장들의 시기 질투를 받은 적이 있다.

학원의 수강실을 한 번 개조한 적이 있었는데, 큰 강의실 한 개를 칸막이를 해서 두 개로 나누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교육청에서 신고가 들어왔다며 담당자가 줄자를 가지고 와서 개조한 교실의 크기를 재고 가는 것이었다. 학원법상 강의실이 조금 작으니까 다시 넓게 개조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기가 차서 그 담당자에서 누가 고소를 하였느냐고 하자 그건 말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이다. 이제 그 몇 센티 작은 것 때문에 강의실을 다시 돈을 들여 고쳐야 하는 것이 화가 나서 계속 누구냐고... 혹시 학부모냐고 했더니 아니라고 해서 혹시 타 학원장이 고소했느냐고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믿기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그 구역의 원장들 끼리 친목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 한 명이 고소를 한 것이 아닌가?

이후에는 우리 학원을 고발한 원장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가기도 해서 모임에 가서도 즐겁게 지내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그 고발 사건 이후에 학원은 더 잘되었기 때문에 시기심이  결국 본인에게만 상처를 주는 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다음은 책에 있는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본 것이다.

시기하는 이들은 주위 사람들이 번영하는 모습에서 고통을 느끼기에 좀처럼 만족을 얻지 못하며

우리와 주위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유발한다. 사탄도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를 향해 시기심을 품었을 것이다. 왜냐면 그 부부는 사탄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기는 악인들의 주된 특징 중 하나다. 사악한 자들은 자신이 불행하므로 다른 이들이 삶까지 망쳐놓으려 한다. 그들의 시기심은 특히 자신과 유사한 부류에 속한 이들을 향해 강하게 드러난다..

시기의 핵심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만물에 대한 그분의 주권적인 다스림을 훼방하려는 의도가 자리 잡고 있다.


 창세기에서 라헬의 시기는 그녀의 삶에 해로운 영향을 끼쳤다. 이로 인해 남편에게 무리한 일을 요구했으며 자신의 소원은 이루었지만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창;35장 16-19)

잠언 14장 50절에서는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시기심은 아무 만족을 주지 못하지만 사람들은 늘 그 죄에 얽매여 살아간다. 이는 인간의 죄가 지극한 광기임을 보여준다.

다른 이의 평판을 깎아내리거나 그가 불운을 겪을 때 기뻐하는 일은 우리에게 참된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기를 받는 이들이 겪는 불행이나 역경은 오히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려고 택하신 방편일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시기심이 악화되는 것은 특히 같은 길을 걷는 이들과 자신을 비교할 때다. 오늘날 널리 퍼진 소셜미디어는 이 문제를 더욱 가중시킨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상당히 왜곡된 관점에서 다른 이들의 삶을 바라보게 만든다.

소셜 미디어에서 우리는 흔히 주위 사람들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지켜본다. 우리가 소셜미디어에 몰입할 때 기존의 우울증이 발병하거나 심지어 새로 발병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소셜 미디어를 통해 경험하는 것은 우울한 이들이 저마다 자기 삶이 행복한 듯이 애써 꾸미고 서로를 바라보는 현상이다. 시기심은 우리 삶에서 참된 행복을 앗아가고 그 자리에 깊은 우울감을 남긴다.


또한 시기는 부질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어떤 이들에게 무언가를 베푸셨을 때 겉으로는 선물로 보였던 것이 오히려 해로운 결과를 낳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의 선하심과 지혜, 능력과 주권을 믿는다면 시기의 죄에 빠질 이유가 없다. 성경에서는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쓸 것을 다 공급해 주신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가 다른 이들을 굳이 시기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특히 시기심에 빠진 이들은

첫째 자존감이 결핍되어 있다.

둘째 다른 이의 성공을 기뻐하는 관대한 정신이나 선의가 결핍되어 있다.

셋째 관용이나 이타심이 부족하다.

넷째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다.


그러므로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한 시기하는 자들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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