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츠 더스트(Bites the Dust)(4화)
‘바이츠 더스트’ 사무실 내부. 현승과 실장이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다. 실장이 계약서를 내밀며 설명하면, 현승이 계약서 안에 적힌 약관들을 읽어 본다.
“주요 약관은 이렇습니다. 첫째, 본 서비스는 의뢰인의 동의하에 진행하되, 한 번 계약이 체결되면 번복이 어렵습니다. 둘째, 집행인과 의뢰인은 두 번 이상 만나지 않습니다.”
현승이 주춤하다 서명했다. 실장이 설명을 이어갔다.
“셋째, 의뢰인이 선호하지 않는 집행방식은 제외할 수 있습니다. 다음 중 선호하지 않는 사고사 유형이 있습니까?”
실장이 약관 한쪽을 가리키면 ‘사고사 유형: 익사, 감전사, 추락사, 동사, 불에 타 죽는 분사,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 폭발로 인한 사망, 떨어진 물건에 의한 사망, 의료사고로 인한 사망 등’이 표기돼 있다.
“어… 한 번에 갈 수 있게만 해 주세요. 고통은 짧게.”
“그럼 비교적 선호도가 낮은 익사와 분사는 제외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집행일은 현시점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의뢰인의 생일입니다. 1989년 8월 5일생 나현승 씨 맞으시죠?”
“네. 구체적인 시간이나 장소는 어떻게…?”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아…”
“집행 전 최종적으로 창립주의 승인을 거치며, 변동사항이 생길 수 있습니다. 물론 선례는 없지만요.”
실장이 서늘하게 웃었다.
“계약금 100원은 현금이십니까?”
현승이 주머니를 뒤져 100원을 내밀었다. 실장은 동전과 계약서를 챙기며 미소를 지었다.
“계약 체결이 완료되었습니다. 보안상 계약서는 모두 저희가 보관하겠습니다. 집행일까지 남은 2주 동안 조용히 신변정리 부탁드립니다. 안녕히 가세요.”
계약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서는 동안에도 현승은 현실감이 안 들었다. 휴대폰 달력은 7월 23일을 가리켰다.
‘2주 후면, 나 진짜 죽는 건가?’
현승이 긴장 섞인 한숨을 내쉬는데, 중식이 달려와 현승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구겨진 가족사진과 포켓몬 가방을 다짜고짜 현승에게 들이밀었다.
“선생님, 이거 좀…”
현승은 당황했다.
“이걸 왜 저한테…”
“미친 소린 거 아는데, 이거 우리 선우한테 좀 전해주면 안 될까요?”
“네?”
“실장인가 한테 물어보니까, 우리 선우 저기 미담초등학교 다닐 거라던데. 거기 입학식서 이것만 전해주면 되거든요? 선우가 꼭 갖고 싶어 했던 거라…”
“네? 지금 무슨 말씀을…”
“애한테 마지막으로 이거는 꼭 해 주고 싶어서 그래요… 입학식 날 이 가방 메고 사진도 찍고 맛있는 것도 먹자 했는데… 선생님, 어떻게 좀 안될까요?”
“아니, 그래도 제가 이걸 어떻게…”
“내가 줄 자신이 없어서 그래요. 집행일은 코 앞인데, 지금 이거 주면 우리 선우 눈치 빨라서 의심부터 할 거고, 내가 뭐라고 설명을 해요… 나중에 커서 애비가 먼저 갈 준비한 거 알면 그 속이 얼마나…”
“죄송합니다.”
현승은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하고 가려했지만, 중식은 주머니에서 구겨진 5천 원짜리 지폐를 현승의 손에 쥐여주며 애원했다.
“이거 내 전 재산이에요. 이거라도 드릴게… 꼭 좀 부탁합니다.”
그때, 류영이 건물에서 나와 옆으로 지나갔다. 현승이 잠깐 류영에게 한눈판 사이, 중식이 재빠르게 현승의 손에 5천 원짜리와 가족사진, 포켓몬 가방을 쥐여주고 도망치며 외쳤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현승은 난감한 얼굴로 한참을 그곳에 서 있었다.
밤거리를 걷던 현승은 포켓몬 가방이 든 봉지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몇 걸음 가다 찜찜한 듯 걸음을 멈추고.
‘하, 왜 하필 나한테?’
고민을 거듭하던 현승은 결국 쓰레기통으로 돌아와 포켓몬 가방을 도로 집어 들었다.
고시텔로 돌아온 현승은 포켓몬 가방을 방 한구석에 툭 던져놓았다. 어지러운 방을 돌아보자 실장의 말이 떠올랐다.
‘집행일까지 남은 2주 동안 조용히 신변정리 부탁드립니다.’
현승은 비닐봉지를 가져다 쓰레기와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서랍 속에서 빛바랜 수첩을 발견해 펼쳐 보는 현승. 언젠가 써 놓은 인생 버킷리스트. 첫 장에 적힌 ‘퇴사하기’를 보자 현승의 얼굴이 묘하게 상기됐다.
‘집행일 D-13’ 아침. 현승은 셔츠 앞주머니에 버킷리스트 수첩과 작은 펜을 꽂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았다. 휴대폰으로 록밴드 퀸의 <Another One Bites the Dust>를 들으며 공사장에 출근하는 현승. 점심시간이 되자, 동료들을 따라가 밥도 같이 먹고 후식으로 커피까지 샀다.
“현승, 오늘 무슨 좋은 날이야?”
“애인이라도 생겼나 봐?”
껄껄 웃는 동료들과 의아하다는 듯 현승을 바라보는 세희. 현승은 씩 웃어 보이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사직서를 꺼냈다. 당황해하는 사장과 동료들을 뒤로하고 공사장 사무실을 나서는 현승. 후련한 얼굴로 버킷리스트 ‘퇴사하기’에 줄을 긋는다.
고급 헤어숍. 현승이 머리를 하고 있다. 휴대폰으로 퇴직금 입금 문자메시지가 오고, 현승은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버킷리스트 ‘비싼 머리 하기’에 줄을 긋는다.
백화점. 현승은 비싼 정장을 골라 입어보다 결제하고 나온다. 수첩을 꺼내 버킷리스트 ‘명품 정장 사 입기’에 줄을 긋는 현승.
‘집행일 D-12’. 해안도로에서 스포츠카를 타고 환호하며 달리는 현승. 버킷리스트 ‘스포츠카 타고 드라이브하기’에 줄을 긋는다.
‘집행일 D-11’. 양손 가득 종이가방을 들고 휘파람 불며 고시텔에 도착한 현승. 방문 앞에 엄마의 반찬통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는 얼굴이 굳어진다.
작고 허름한 가정집. 현승의 본가다. 현승은 반찬통이 가득 든 종이가방을 양손에 들고 안으로 들어온다. 현승 모는 갑작스러운 아들의 방문에 놀라 마중 나오고, 현승 부는 어색한 듯 방으로 들어간다. 현승 모의 얼굴에는 반가움과 걱정스러움이 섞여 있다.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집밥 얻어먹으러 왔어요.”
“잘됐다! 너 좋아하는 꽁치찌개 해 놨는데. 앉아 있어!”
오래간만에 밥상 앞에 모여 앉아 밥 먹는 세 사람.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현승이 먼저 입을 연다.
“술 한잔 하실래요?”
현승 부가 반색하며 현승 모를 쳐다보고,
“술? 어, 좋지. 여보, 매실주 담근 거 있지? 그거 내 와 봐.”
현승 모가 들떠서는 벌떡 일어나 매실주 담긴 페트병과 술잔을 가져온다.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는 분위기 속에 의아한 눈빛을 주고받는 현승 부와 현승 모.
“이게 얼마 만이냐.”
“그동안 죄송했어요.”
“네가 뭐가 말이냐. 내가 죄인이지. 못난 애비 만나서…”
순간, 현승의 머릿속에 얼마 전 중식이 했던 말이 스쳤다.
‘못난 애비는 없느니만 못하지 않나?’
숙연해진 현승.
“…두 분은 오래오래 사세요.”
현승 부가 울컥하며 말했다.
“뜬금없기는…”
현승 모는 문득 아들이 걱정스러워 묻는다.
“너 혹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이 사람은!”
“맞다. 어제 방 청소하다가 너 어릴 때 앨범 찾았는데. 볼래?”
“앨범이요…?”
벌떡 일어나 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현승 모. 그녀의 덧버선 뒤꿈치가 다 해져 있는 것을 본 현승은 서글퍼진다.
세 사람은 오래된 사진 앨범을 들여다보며 말이 없어졌다. 현승의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나란히 다리를 묶고 달리는 모습, 소풍 가서 김밥을 까먹는 모습, 어린 현승이 축구공을 갖고 노는 모습… 사진 속 밝은 그들의 모습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현승 모가 먼저 입을 뗐다.
“너 어렸을 때 공 진짜 잘 찼는데.”
“잘 차긴…”
“너 축구선수가 꿈이었잖아. 체육 쌤도 너 얼마나 이뻐했다고.”
현승은 울적해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현승은 어려서부터 숙제 하나는 열심히 해가던 학생이었다. 성인이 된 지금도 그는 숙제를 풀고 있었다. 어려운 문제로 가득한 숙제들. 평생 안 끝날 것만 같던 그것을 이제는 끝낼 수 있게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죽기로 결심하자 숨통이 트인 것이다.
‘내가 떠난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거지?’
현승은 자신의 늙은 부모의 얼굴을 보았다. 목이 멘 현승이 집에 가야겠다며 일어났다. 집을 나서려는데, 현승 부가 서둘러 방에 들어갔다가 축구공 하나를 들고 나오더니 현승에게 건넸다. 어릴 때 현승이 갖고 놀던 축구공이었다. 이걸 아직도 안 버렸다니. 현승 부가 용기 내듯 말했다.
“취미로 다시 해 봐.”
현승은 공을 밀어냈다.
“됐어요.”
현승 부가 무안해하자, 현승 모가 옆에서 거들었다.
“왜~ 운동도 되고 좋잖아.”
두 사람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공을 받아 들고 나온 현승.
‘이제 와서 무슨…’
고시텔로 돌아온 현승은 축구공을 방 한구석에 던져놓았다. 양말을 벗다가 현승 모의 낡은 덧버선이 생각나 휴대폰으로 ‘덧버선’을 검색해 보는 현승. 알록달록한 문양의 덧버선들을 주문하고, 텅 빈 방을 둘러보다가 포켓몬 가방을 발견한다. 난감한 한숨을 내쉬는 현승.
‘집행일 D-10’. 현승은 포켓몬 가방을 중식에게 돌려주기 위해 자신이 일하던 공사장을 다시 찾았다. 그곳에는 동료 인부 몇몇과 신입 일꾼들이 뒤섞여 벽돌과 철근을 옮기고 있었다. 현승은 사무실 앞에서 두리번거리다 세희와 눈을 마주쳤다. 괜히 뜨끔해서 얼른 눈을 피하는 현승. 지나가던 한 동료를 붙잡고 중식을 만나러 왔다며, 그의 위치를 물었다. 동료는 놀라며 답했다.
“박 씨? 아유, 소식 못 들었나부네. 얼마 전에 뺑소니 트럭에 치여 죽었다는디… 오늘이 장례식 마지막 날이랬나?”
그대로 굳어버린 현승. 뺑소니라고? 그때 현승의 머릿속에 ‘사고사위장시스템’을 소개하던 ‘바이츠 더스트’ 실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회사가 정말 중식을 죽인 것인가? 현승은 멍하니 포켓몬 가방만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