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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병호 Aug 16. 2023

한글을 닮은 내 딸 하민이에게

일에 대한 생각

한글을 닮은 내 딸 하민이에게


아빠가 한글 서체를 만들게 된 건 초등학교 친구 덕분이야.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글씨를 참 잘 썼거든. ‘나도 저렇게 쓸 수 있으면 좋겠다.’ 하고 부러워하기만 했는데, 어느 날 다른 친구가 내게 말했어. 내 글씨도 예쁘다는 말이었지.


그때부터 내가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건 손으로 글자를 쓰는 일이라는 걸 알았어. 아빠가 글자체를 디자인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된 이유야.


같은 일을 하는 네 엄마를 만나 결혼한 후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어떤 이름을 줄지 고민을 많이 했어. 둘 다 한글 디자이너인 만큼 우리는 ‘훈민정음’으로 이름을 짓고 싶었어.


‘훈’이는 짙은 눈썹에 정의감 넘치는 아이가 그려졌고, ‘민’이는 순하고 조용하지만, 늘 엄마 아빠 곁에 있는 아이의 모습일 것 같았지. 그리고 ‘정음’이는 장난기 많은 아이일 거라고 생각했어.


지난해 9월 30일, 30시간의 긴 산통 끝에 태어난 너를 보며 네 엄마와 나는 ‘이 아이는 민이구나.’ 하고 확신했어. 그때의 네 모습이 동그랗고 순한 ‘ㅇ’을 꼭 닮은 것 같았거든.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 네가 방금 아빠에게 기어와 웃어주고 가는구나. 지금은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민이가 한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이 편지를 읽는 날도 오겠지.


그때의 민이와 함께 나누고 싶은 글이 있어. 네 엄마가 한글박물관에서 열린 한 전시를 보고 내게 전해 준 글귀야. ‘한글의 디자인 정신은 쉽고 간단한 글자를 만들어 편히 쓰게 한, 사람을 위하는 세종의 마음이다.’


어때? 멋지지 않니? 엄마 아빠는 멋진 한글 이름을 가진 우리 민이가 한글처럼 누군가에게 유익을 주는 마음이 넉넉한 아이로 자라길 바라. 그리고 온전히 너만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창제 이유가 명확하고,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기록된 세계 유일무이한 문자 한글처럼.


강병호 님 | 서체 디자이너

좋은생각, 황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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