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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썰 Nov 22. 2024

소설, 김치의 날

20241122/금/맑음/소설, 김치의 날

.#배추 #김치 # 독립운동가

통. 우리 배추 사이에서는 이 말이 보편적이다. 인간들은 '포기는 배추셀 때나 하는 말'처럼 '포기'라는 단어로 우리를 칭하는데 말 그대로 어감이 좋지 않고, 배운 우리로서는 작금의 시대상처럼 'foggy'가 떠올라 '통'을 쓴다. 부산지역에서 학교 '짱'을 '통'이라 부르는 것도 우리 영향인걸 인간들은 잘 모르고 쓴다.

각설하고, 이렇게 강했던 우리 배춧국(國)이 인간들의 식민지로 전락한 지 어언 2년 반. 지네들이 쓰는 고액권 화폐를 배춧잎이니 뭐니 하며 화친의 제스처를 보이며 우리 몸값을 2만 원 가까이 까지 올릴 때 경계했어야 했다. 강제 병합이 되고 난 뒤 칼잡이를 동원해서 우리 배추동료들을 도마 위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며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몸값도 2천 원까지 떨어뜨렸다. 우리(통)를 감시하기 위해 통감부라는 기관을 만들더니 급기야 배추총독부로 승격시켜 통감이었던 굥이란 자를 '대통' 혹은 '통령'이라 불리는 직위에 세우고 탄압을 가속화했다.


드디어 운명의 날이 왔다. 대배추 담화일. 잘 짜인 각본대로 진행될 막장드라마를 담화로 잘 포장한 건 유화정책의 일환이다. 난 오랜 기간의 노력 끝에 친인파로 스며들어 배추싸대기 역할을 얻어냈다. 담화장에서 각종 양념으로 분장을 받고 담화의 클라이맥스에 굥의 뺨에 살짝 양념을 묻히면 되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화난 채심()을 달래고 동정을 얻기 위한 자작극이다. 목이 아프다며 그만하자는 멘트를 신호로 배추(拜趨 : 윗사람 앞에 나아감) 후에 몸이 들려 굥의 뺨을 향한다. 이 순간 각본대로라면 난 잎에 힘을 풀고 요령껏 양념만 털어내는 연기만 잘하면 되는 것이다. 타격감은 최소화하고 시각적 효과는 최대화해서 채민 동포들을 속이는 것이 내 역할이다. 이 장면만 잘 소화해 내면 난 남은 채생(菜生)을 부귀와 영화 속에 살게 될 거다. 내 통이 그의 뺨으로 가까워지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가 살짝 웃는다. 순간 난 잎의 각도를 틀어 날을 세운다. 오랜 고통을 견디며 숨어 연마한 잎날! 시퍼렇게 날이 선 내 잎이 살짝 아래로 꺾여 그의 목을 향한다. 곧 진짜로 목이 아플 거다. 당황함에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 티 나게 일률적인 탄성과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진 후 금세 장내는 조용해진다. 사방으로 튄 붉은 자국이 양념인 줄 아는 거다. 그는 목을 부여잡고 쓰러진다. 모두들 놀란다. 발군의 연기력이라 생각할 거다. 지난 폭정과 억압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난다. 이 순간 모든 게 멈춘 거 같다. 꿈이라면 깨지 말았으면...


절기상 소설(小雪)이자 '김치의 날'이라 아재력을 끌어올려본다. '아재의 날'이다.


p.s. 김치의 날 : 김치 소재 하나하나(11월)가 모여 22가지(22일)의 효능을 나타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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