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지지 않으면, 언젠가 무너진다
한동안 글을 쓸 시간이 부족했다. 아니... 사실 시간이 부족하기보다는 (글을 써야 한다는) 의식이 부족했다. 그렇다. 이 말이 맞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핑계가 '시간이 없어서'라는 말이라 그러지 않았던가. 24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다. 그런데 누군가는 시간이 없어 못하고, 누군가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해낸다. 아이러니하다. 그럼, 왜 나는 "시간이 부족했다"는 핑계를 댔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핑계는 '책임감'과 연관이 깊다. 책임감은 일종의 사명감과도 비슷한 감정인데, 왠지 내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고 해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의무가 주어진 것도, 회사일처럼 하지 않는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해야만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겐 글쓰기가 그런 것이다. 나 스스로가 나에게 책임감을 부여하고 있는 가장 큰 행위 중 하나다. 한동안 글을 쓰지 않으면 마음이 혼잡해지고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마음속 감정의 서랍장이 어질러져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래서 그만큼 오랜만에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 나열하고 고민하며 써 내려가다 보면 조금씩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리고 그 글이 끝내 누군가에게 전해져 좋은 영향을 줬다고 느끼면, 그 기쁨은 증폭된다. 책임감이 성취감과 행복감으로 승화되는 과정이다. 이 메커니즘은 생각보다 큰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종류의 책임('글을 써야 한다'는)은 나 자신에게만 해당된다. 세상에는 이 외에도 수많은 종류와 무게의 책임이 있다. 누군가는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나라를, 혹은 전 세계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도 있다. 책임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부담감은 커지고, 동시에 그 일을 이뤘을 때의 성취감도 커진다. 하지만 책임의 무게를 떠나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점이 있다.
그건 바로, 각자의 책임을 지기 위해 주어진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는 것과, 그를 잘 견뎌냈을 때 앞으로 져야 할 삶의 무게도 점점 가벼워진다는 것이다. 모두에게는 각자가 질 수 있는 책임이 있고, 그게 무엇인지는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지신의 그릇을 넘어 지나치게 큰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은 '오만'이고, 져야할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는 것은 '태만'이다. 요즘은 내가 오만하거나 태만하지는 않은지 자주 돌아보게 된다.
좋은 글을 많이 쓰고는 싶지만,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글의 양과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한계를 정할 필요는 없지만, 이상만 높고 책임과 노력은 다하고 있는 모습은 아닌지 말이다.
또 한편으론, 요즘은 책임지기는 꺼려하는 문화가 점점 많아지는 것만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소위 말하는 '꼰대'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아서일까. 글쓰기도 그렇듯, 오만한 인간의 본성과 생각을 다듬기 위해 책임을 지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게 '더 나은 인간'이 되는 유일한 길인데, 많은 세상의 문화와 세태가 책임보다는 편법과 편리함만을 추구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이쯤에서 "네 일이나 걱정하라"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 맞다. 나부터 내가 처한 환경에서 나의 책임을 다 하려고 하면 될 일이다.
나의 책임을 다 하기 위해 자꾸만 의식을 되살려야 한다. 나는 왜 글을 쓰고 있는가. 이 글은 나 자신을 위한 치유인가. 누군가에게 깨달음을 전하기 위한 가르침인가. 그 이전에, 내가 뭐길래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건지 의식 속에서 곱씹어야 한다.
책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생각이 많지만, 모두가 아는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주어진 책임의 무게를 부단히 견디지 않는 삶은, 결국 언젠가 권태와 오만이라는 거대한 짐에 눌려 소멸하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이 또한, 나를 향한 경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