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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Oct 14. 2021

철부지


10월 8일 열일곱째 절기를 지났다.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는 한로(寒露). 절기를 체크할 때마다 거대한 순환 체계 속에 살고 있음을 느낀다. 과학을 몸으로 이해한달까. 동이 트면 유리창에 자잘한 물방울이 맺힌다. 발가락이 시려워서 몸을 덮은 이불 끝자락을 발뒤꿈치 아래로 말아 넣게 되면 달력을 보지 않아도 한로 즈음이다. 가을이 짙어진다.



한낮의 볕은 아직 따사롭지만 아침에 다실 문을 열면 낮에 품었을 온기는 온데간데없다. 이제는 낮보다 긴 밤의 시간 동안 사방으로 찬 기운을 받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으슬한 기운이 들어서 나무 행거에 걸어둔 로브를 걸친다. 이국의 여인이 베틀로 이 아름다운 무늬들을 한 줄 한 줄 짜내었다고 한다. 아이를 보듬던 손으로 만들어서인지 그리 두껍지 않아도 금세 몸을 따스하게 한다. 여름의 관성이 남아있는 가을에는 적응하기 위해서 무엇인가에 의존하게 된다. 옷이든, 차든, 사람이든.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고, 로브의 옷깃을 좀 더 여민다. 찻물도 함께 올리지만 선선한 바람 때문에 예전만큼 빨리 끓지 않는다. 기다리며 밖을 바라 볼 시간이 늘었다. 이 한가로운 시간에 철을 읽는다. 해가 가는 길이 지면과 많이 가까워져서 아침에는 동쪽 산에 해가 아슬하게 걸려있다. 산에는 초록의 생생함이 잦아든 것 같다. 소나무도 이맘때부터는 푸름의 결이 달라진다.


 

‘철이 났다’는 말은 계절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고, 변화를 농사에 활용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긴 사람에게 쓰던 말이다. 나 스스로에게 철이 났다는 말은 언제쯤 할 수 있을까. 변화를 다만 느낄 뿐. 자연의 변화에도, 관계의 변화에도 유연하게 활용할 지혜를 갖는다는 건 아득히 먼 일 같다. 남들은 수확을 하는 철이 도래했는데, 나의 철은 언제인지. 물더러 빨리 끓으라고 채근하는 것처럼 쓸데없음에도 조바심이 난다. 그럴수록 물은 더디 끓던데. 모든 것이 수렴해가는 한로에, 나는 여전히 철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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