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데이터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아날로그 세계에 에너지를 만드는 석유나 화석연료처럼, 디지털세계의 에너지원은 데이터이다. 데이터는 좁게는 실험, 설문, 조사 등을 통해 수집된 숫자, 문자, 그림, 음성, 영상, 전자신호 등을 의미하며 넓은 의미로는 사람 또는 기계가 사용가능한 모든 기록물을 뜻한다. 모든 기록은 데이터이다.
고대 인구조사, 장영실의 측우기, 티코 브라헤의 천제관측 기록, 고대 토지대장, 파피루스, 필사하거나 인쇄한 책, 컴퓨터로 작성한 문서, 다양한 센서로 측정된 값, 클라우드에 저장된 파일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데이터가 있다. 특히 0과 1의 디지털 신호 형태로 저장과 복제가 용이한 데이터가 등장하면서 매년 두 배씩 크기(Volume)가 증가하고 있다. 또한 네트워크와 센서 기술이 발달에 힘입어 속도(Velocity)와 다양성(Variety)도 증폭하며 소위 ‘빅데이터’로 불리는 총기록 사회에 접어들었다.
데이터 아트가 걸어온 길
데이터는 본질적으로 수집, 저장, 인식, 복제, 가공이 가능하며 시간에 민감하다. 동시에 데이터는 사회적 문제를 드러나게 할 수 있는 속성을 지니고 있어 미디어 아티스트에게는 작품의 소재이자 주제이며 탐구거리가 되는 예술적 영감 그 자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데이터를 시각화하는 단계에서 데이터를 통해 예술적 의미와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려는 예술가들의 노력이 적지 않게 진행되어왔다. 대표적인 아티스트의 작품을 따라가면서 데이터 아트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자.
데이터 아트선구자 존마에다: 1990년대에 이미 데이터를 활용하여 예술적인 작업을 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있다. MIT 미디어 랩을 이끌던 존 마에다(John Maeda) 교수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인 JAVA를 기반으로 시각적 표현이 가능한 언어를 만들었다. 존 마에다는 모리사와(Morisawa) 타입페이스사를 위해 10개의 포스터 시리즈를 디자인하고, 수학적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우아한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데이터 시각화의 역사에 있어서 단지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드는 일 이상의 적을 남겼다.
John Maeda, The 10 Morisawa Posters(1996-1997)
빅데이터의 시각화를 실현한 아론 코블린 : 구글의 데이터 아트 팀을 이끌었던 아론 코블린(Aaron Koblin)은 대량의 온라인 데이터를 활용해 시각화를 구현했다. 북미 대륙의 항공편 경로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시각화한 Flight Patterns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자넷 에켈만(Jannet Echelman)과 협업하여 만든 Unnumbered Sparks를 통해 관객들이 모바일 디바이스에서 입력한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거대한 그물망 캔버스에 투사되면서 그려지는 인상적인 설치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Aaron Koblin, Flight Patterns (2005)
만질수 있는 데이터를 만든 나탈리 미바흐: 물리적 세계에서 생성된 데이터를 실제로 만져볼 수 있는 형태의 시각화로 만드는 예술인 나탈리 미바흐(Nathalie Miebach)는 날씨와 조류의 변화를 측정하고 이 데이터를 이용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조각과 귀로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데이터가 컴퓨터 스크린 밖으로 뛰쳐나와 스스로 몸을 갖도록 만든 그녀의 작품은 데이터 시각화에 대한 고정 관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Nathalie Miebach, Warm Winter(2007)
움직이는 조각 데이터를 만든 유시 안게슬레바 :미디어 아트 스튜디오 ART+COM의 아트 디렉터인 유시 안게슬레바(Jussi Ängeslevä)는 키네틱 조각가(kinetic sculpture)이다. 싱가포르 창이공항을 위한 키네틱 조각에서는 작은 물방울 모양의 알루미늄 공이 공항 출발장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며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상상력과 기술력이 결합하여 금속이라는 단단한 소재를 이용해 마치 유체의 흐름 같은 부드러운 움직임을 구현해낸 멋진 데이터 시각화 작품이다.
유시 안게슬레바, Kinetic Rain(2012)
숨겨진 데이터의 의미를 찾아내는 김영희 : 홍익대 디자인커버젼스학부 김영희 교수는 90년대 중반부터 웨어러블, 키네틱, 탠저블 미디어 등 다양한 디지털미디어 플랫폼으로 작품 활동을 해왔다. 그는 2015년부터 여러 경로의 실시간 데이터와 간단한 알고리즘을 섞어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툴로서 데이터쿡 온라인 플랫폼 구축한 후, 방대한 실시간 데이터를 섞어 '데이터의 무게(Weight of Data) '시리즈를 창작하여 전시했다. 그는 데이터로 이뤄진 가상(virtual) 가치를 비트코인 1개로 거래할 수 있는 정도의 쌀 무게로 환산했다. 그는 데이터가 단순히 분석하고 정보로 전환되는 지표라는 의미를 넘어 데이터에 숨은 이야기들을 예술적 소재와 영감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김영희, 데이터의 무게 시리즈 소금과 설탕(2018)
디지털 메커니즘의 반봉건주의, 포렌식 아키텍처: 영국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에 기반을 둔 연구단체인 포렌식 아키텍쳐(Forensic Architecture)는 건축가, 예술가, 기자, 소프트웨어 개발자, 과학자, 변호사 등 다양한 영역과 학문의 협력자들로 구성돼 광범위한 네트워크이다. 2010년 에알 바이츠먼 교수가 처음 결성한 이래 포렌식 아키텍처는 국제 검찰과 인권, 사회, 정치 및 환경 단체를 대표하여 건축과 미디어에 대해 진보적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포렌식 아키텍처는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 북쪽 경계에서 발생한 베두인족의 강제이주와 폭력의 역사를 주목하고, ‘움 알-히란에서의 살인’을 데이터 기반의 비디오작품으로 만들었다.
이 작품은 디지털협업의 구체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여러 단체와 지역민들의 협력으로 ‘시민위성’을 만들어 항공 및 지상관측 사진 등 모든 미디어를 이용해 정보를 수집하였다. 이를 통해 장기간에 대규모로 바뀐 환경과 그 변화가 야기한 갈등을 연결시킴으로써 이 마을에 가해진 폭력을 증명한다. 작품은 2019년 3월 국립현대미술관 <불온한 데이터> 주제전시 발표되었다.
포렌식 아키텍처, 움 알 히란에서의 살인, 2018, 싱글채널 비디오, 11분
데이터 아트의 미래,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데이터
예술과 기술은 본래 같은 뿌리를 공유하며, 데이터 아트는 특히 기술의 발전과 불과분관계이다. 데이터 아티스트의 작품 세계는 프린트, 비디오 레코딩, 실시간 인터랙션, 피지컬 컴퓨팅 등 여러 가지 기술이 적용된다. 예술가의 상상을 구현하기 위해 적합한 기술을 선택하기도 하고, 반대로 당시의 기술적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시도에서 새로운 상상을 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데이터를 물리적 공간에 표현하는데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데이터를 탐색하기 위해 실제 물리적 공간이 필요없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가상현실 기술은 직접 자신의 신체를 활용해 데이터를 탐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간의 크기를 거의 무한대로 늘릴 수도 있다. 이제 본격 상업화 단계에 이른 메타버스, 디지털트윈, 가상현실은 데이터 아티스트에게 새로운 기술을 통해 어떻게 데이터의 의미를 발견하고 인간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통찰력을 제시하는 새로운 도구를 제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