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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니워커 Aug 28. 2022

외양간과 양의 동상이몽

3. 한 달의 유예기간, 나를 위해 너를 위해



그의 발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처음부터 냉정할 수 있었다.

아니, 냉정한 척할 수 있었다.


그에게 바로 폰을 들이밀며 말했다.

“왜 또 거짓말해요?”


증거를 보여주자 순간 눈빛이 흔들리더니, 이내 체념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며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


“세 번째네..? 이제 더는 안 되는 거 알죠?

헤어지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며 세차게 고개를 흔든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헤어지자는 말은 하지 마.”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게 애원하는 그를 봐도 이제는 정말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한 번도,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에요. 내가 그렇게 병신처럼 보여요? 하긴, 병신 맞지. 얼마나 내가 우스웠을까.”


자조 섞인 말 따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순간 내 솔직한 심정은 그랬다.

세상에 이런 병신이 또 있을까.

대체 뭘 기대하고 뭘 꿈꿨던 걸까.


“아니야.. 그런 말 하지 마 자기야.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어.”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눈과 떨리는 목소리.


그래, 당신이 지금 진심으로 사과하는 거 알아요.


하지만 나도 지금 진심이에요.


이제 정말 더는 내가 너무 머저리 같아서 안 되겠어.



그날은 일요일 저녁이었고, 난 내일 출근을 해야 했다. 그는 재택근무 중이었다.


“난 지금 당신을 더 보고 싶지 않으니까, 나가요.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니 당신이 나가요. 내일 내가 출근한 다음 집으로 돌아오든 그건 당신 마음대로 하고, 지금은 내 눈에 띄지 마요.”


할 말이 없는 그는 망설이다가 조용히 가방에 지갑과 노트북만 넣고선 곧 집을 나섰다.


고양이들과 나만 남은 집.

순간 적막이 흘렀다.


당연하게도 잠은 한 숨도 오지 않았고, 힘들게 잠깐 잠이 들었다가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이 깼다.

눈물이 터져 나왔고, 깊은 새벽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퉁퉁 부은 눈으로 다음 날 출근했더니 동료들이 모두 눈이 왜 그러냐고 하는데, 고양이 털 알레르기라고 했더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이고 사이좋은 우리 부부에게 어제 그런 일이 벌어졌을 거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 할 테지.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가 집에 들어와 있었다. 당연하게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서로 저녁을 먹을 정신 따위 없었다.


“우리 얘기 좀 할까? 집은 답답하니까 나가서 좀 걷자 여보.”

평소처럼 다정한 말투로 말을 걸어오는 그.


어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나 들어봐야지.


우리의 단골 산책코스인 한강으로 걸어갔다.

집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한강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러닝 장소이자 힐링 장소였다.

또 한편으로는 그의 첫 번째 외도가 걸렸을 때도 이렇게 한강에 나와서 걸었던 기억이 있는 장소이다. 이게 무슨 루틴처럼 굳어진 건가, 우습단 생각이 들었다.


봄 밤, 날이 너무 좋았다.

10분 정도 말없이 걷다가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한테는 내일 퇴근하고 바로 가서 헤어지자고 말하고 올게요. 진작 끝냈어야 했던 관계인데, 내가 미련해서.. 끊어내는 걸 잘 못해서 여기까지 와버렸어.. 다 내 잘못이야.”

그래, 당신 잘못이지. 그리고 그 여자도 똑같이 내게 죄를 지었고.


“정말 염치없는 거 너무 잘 알지만,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내가 정말.. 이런 말 하는 것도 정말 부끄럽지만 난 자기랑 못 헤어져. 제발..”


애원하는 그를 보고 또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하지만 이 마음은 이제 지난번처럼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은 아니다. 지난 7년 간 함께 한 우리 관계에 대한 연민, 내 젊은 시절을 모두 보내버린 나 자신에 대한 연민,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이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 모든 게 뒤섞인 감정이었다.


어제까지는 단호하게 지금 바로, 당장 내일 이혼절차를 밟자고 말하고 싶었다. 더 이상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하루 사이에 내 머리는 꽤 냉정해질 수 있었고, 어차피 이혼을 할 거라면 좀 더 알아본 뒤에 절차를 밟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이건 내 합리화다. 난 또 멍청하게도 그의 애원에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한 달.. 한 달의 기간을 줄게요. 그 사이 당신도 나도 마음을 정리하자. 이게 당신과 다시 잘해보려는 신호는 아니에요. 그냥 우리가 같이 지내온 시간이 있고, 그게 겨우 하루 이틀 사이에 정리될 마음은 아닐 테니까.. 그러니 한 달간 각자 생각 좀 하고 다시 얘기해요.”


그는 조금은 얼굴이 밝아지며 내 손을 꼭 잡았다.


그에게 희망고문을 시켜버리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 한 들 그 누가 나를 욕할 수 있을까.

오히려 지금의 이 친절한 멘트를 누군가가 들었다면, 가슴을 치며 답답해했겠지.


이 멍청한 여자야, 정신 좀 차리라고.


아름다웠던 한강 야경. 그 와중에 예쁘다며 사진을 찍어두었었다. 그 날의 조명, 온도, 습도 모든 게 사진 한 장 덕분에 지금도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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