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운수 좋은 날
2021년 봄,
이른 봄비로 갓 꽃망울이 터져 나오던 벚꽃이
일시에 무너져 내린 주말,
그의 외도를 또 한 번 알게 된 건
비 갠 화창한 일요일이었다.
그 날은 유독 날이 좋았다.
여느 주말과 똑같이 내가 먼저 눈을 떠서 세탁기를 먼저 돌리고 고양이 2마리의 아침을 챙겨줬다. 꼬리를 부르르 떨며 다가오는 아이들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났다.
함냐 함냐 밥을 먹는 아이들을 확인한 뒤, 거실 창문과 부엌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참 파랬다.
11시 반쯤 느즈막히 그가 안방에서 부시시한 모습으로 걸어 나왔다.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다.
결혼 초반에는 일어나면 나에게 다가와 껴안고 뽀뽀를 하며 아침인사를 했지만, 어느덧 결혼 7년차 부부인 우리 사이에 이제 그런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어제 시댁을 갔다 오느라 주말에 해야 할 집안일이 많이 밀려 있었지만, 점심부터 먹자고 하며 대충 옷을 입고 문 밖을 나섰다.
이 동네는 일요일에 문을 여는 식당이 많지 않아서, 30분 정도 걸어가서 새로운 맛집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워낙 잘 걷는 우리라서 30분 거리는 가벼운 동네 산책처럼 하곤 한다.
난 그런 우리 부부가 참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아파트 단지를 나와서 내가 좋아하는 동네 뒷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집 안에서 볼 때보다 훨씬 하늘이 아름다웠다.
“하와이의 하늘 같아.”
내가 말했다.
“하와이는 이거보다 더 파랗지.”
그가 답했다.
나라고 왜 그걸 모르겠는가.
그 정도로 한국에서 보는 하늘 중에선 참 아름답다는 표현이었는데, 역시 사실 기반으로만 말하는 그 답게 대답했다 싶었다.
식당을 향해가는 길은 인적이 드문 조용한 동네길인데, 이 계절이 되면 벚꽃 가로수가 정말 아름답게 길을 수놓아서 저절로 행복해지곤 한다.
어제 예상치 못한 장대비가 와서 벚꽃의 절정이 너무 한순간에 꺼졌을까 걱정했는데, 그래도 아직 강인하게 생명력을 뽐내는 아이들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설령 비에 젖어 힘 없이 주저 않은 꽃잎들이라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잊지 말아 달라고 외치듯이 분홍빛 꽃 카펫이 길게 깔려 있었다.
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만으로도 내가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로맨틱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내 감상을 말했더니, 그는 역시나 무덤덤하게
“그러게.”
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새로 찾아간 라멘 맛집은 역시나 유명세 답게 줄이 길게 서있었다. 그래도 회전율이 빨라서 30분도 안 되어서 음식을 받을 수 있었고, 기대보다 훌륭한 맛이라 행복해졌다.
다만 욕심부려서 인당 하나씩 추가한 차슈 때문에 배가 많이 불러와서, 집으로 걸어가는 길의 발걸음은 조금 무겁고 느려졌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식후 커피는 빼놓을 수 없었기에, 그가 좋아하는 메이플라떼를 파는 동네 카페로 갔다.
작은 길가의 카페인데 테이블과 의자도 예쁘고, 식물을 적절히 다양하게 배치해 놓아서 공간 자체가 주는 즐거움이 있는 장소다.
테이크 아웃할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빈 창가 테이블에 앉아서 밖을 보는데 이미 많이 앙상해진 벚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 주 한적한 평일 낮시간에 와서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면, 흐드러지게 핀 벚꽃 덕분에 참 몽글몽글 행복한 기분이 들었겠구나 싶었다.
2시간의 꽤 긴 점심시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지체할 틈 없이 집안일을 시작했다.
마침 어제 비로 취소되었던 2021년 프로야구 개막전이 시작된 시간이었다. 야구경기를 틀어 놓고 각자 할 일에 집중했다.
나는 건조를 마친 빨래를 접은 뒤, 고양이 화장실 모래를 버린 후 물청소를 했다.
그는 내가 치운 고양이 화장실 주변부터 시작해서 집 전체의 청소기를 돌렸다.
나는 고양이화장실 청소를 마친 뒤, 일요일 분리수거를 위해 택배박스에 붙은 테이프와 운송장을 손톱 끝을 이용해 하나하나 벗겨 나갔다.
아침에 이미 내 몫의 집안일을 해 둔 상태였기에, 나는 약 한시간 정도의 집안일을 하니 끝이 났다.
그의 청소기 작업은 물걸레 청소까지 해야해서 아직 끝나려면 30분 가량 남은 상태였다.
“여보 난 나가서 뛰고 올 게요. 날씨가 좋아서 낮시간에 갔다 오려고.”
“응, 그래요. 난 오늘은 운동 안 하려고. 피곤하네. 다녀와요.”
7년차 부부가 모두 그렇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서로의 취향과 기호를 존중해주는 편이다.
연애할 때는 서로의 취향에 맞추어 영화를 보곤 했다. 특히 내가 그의 취향을 많이 따라갔었다.
일부러 그렇게 했다기 보다는, 어떤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궁금했기에 기꺼이 그의 취향에 맞추어 영화를 선택했었다.
그렇게 따라 본 영화 중에는 내게도 참 좋았던 작품도 있고, 나랑은 참 맞지 않는 영화도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취향을 충분히 알게 된 이후에는 각자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 것으로 암묵적 합의가 되었다.
그가 좋아하는 SF, 괴수물은 나랑 맞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스토리 중심의 영화는 그와 맞지 않는다.
참 다른 취향을 가진 우리지만 그럼에도 잘 지내고 있는 건 우리가 상대방에게 본인의 취향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늘 그렇지는 않지만.
오늘같이 날이 좋은 주말에도 스스럼없이 혼자 훌쩍 운동을 나올 수 있는 것도, 이런 우리 부부의 삶의 패턴 덕분이다.
오후 4시반쯤 밖에 나오니 아까 봤던 파란 하늘은 구름이 껴서 많이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여전히 바람이 좋고 온도가 좋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강으로 걸어갔다.
평소에는 저녁 9시경 한강을 뛰곤 했는데, 오후시간에 나와보니 한강에 사람이 이렇게 많았었나 싶다.
아마 다들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차마 집에만 있기 힘들어서 나온 거겠지.
우리 집에서 망원 한강공원 끝까지 뛰어갔다 돌아오면 딱 7km 거리인데, 최근 한달 사이에 꾸준히 뛴 덕분에 40분 내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 정한 목표인 10km 59분 이내 기록달성을 위해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서, 내심 뿌듯한 순간들이다.
달리기를 마치고 집에 오니 그가 청소를 이미 마치고 책을 읽고 있었다.
회사 팀장이 선물해준 책인데, 해외 1위 기업은 어떻게 일하는가에 대한 전형적인 비즈니스 관련도서이다.
그는 최근에 큰 도전을 시작하려 준비하고 있다.
9년간 다닌 현 직장을 퇴사하고, 계열사로 이직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직장은 참 좋은 회사지만, 팀장에게 실망한 부분이 컸고, 스스로 업무 발전도 더디다고 생각해서 결심을 굳힌 듯했다.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때 정말 가끔 책을 읽는 그를 보며, 참 한결같다 싶었다.
저녁은 밀키트로 사 놓은 음식을 해먹었는데, 생각보다 맛이 좋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딸기 끝물이라 러닝을 마치고 마트에 들러 사온 3팩 만원짜리 딸기도 적당히 달콤하고 싱싱해서 후식으로 딱 좋았다.
나는 설거지를 하고, 그는 고양이 화장실을 캔 다음 아까 정리해놓은 분리수거를 버리러 나갔다.
여기까지는 여느 때와 정말 놀라울 만큼 똑 같은 일요일 풍경이었다.
그런데 왠지 그날 따라
내가 설거지를 마치고 안방 침대에 놓여져 있는 그의 핸드폰을 보게 되었다.
그의 폰 비밀번호는 내 생일.
어렵지 않게 열 수 있었다.
별다른 내용이 없어 보였는데, 아이폰에서 제공하는 기능 중에 하나인 주간리포트가 눈에 띄었다.
가장 많이 쓴 앱이 표시되었는데, 구글 행아웃이라고 나와 있었다.
‘행아웃을 가장 많이 쓴다고..?’
자연스럽게 앱을 열어보게 되었다.
유독 눈부시고 평화롭고 꽃 같던 4월 첫째 주 일요일 저녁,
그렇게 나는 그의 세번째 외도와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