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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혜연 Nov 14. 2021

우리 모두 달라

당연하지만 무거운 진실


향기나는 것



 사람의 의견은 각기 다르기 마련이다. 취향이나 식성도 마찬가지. 하지만, 우리는 자꾸 그 사실을 잊고 다른 사람의 삶에 발을 쓱 넣곤 한다.

 “네가 몰라서 그렇지, 원래는 내 방식이 맞는 거야.”라면서.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를 예전에는 ‘애완견’이라 불렀다. ‘좋아하여 귀여워하며 곁에 두고 기르는 개’, 애완견의 의미이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은 ‘좋아하여 귀여워하며’, 즉 다시 말해 내가 즐겁기 위해 기르는 동물인 셈이다. 요즘은 ‘애완견’보다 ‘반려견’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한다. 즐거움뿐 아니라 함께 살며 겪게 될 갈등과 어려움 역시 감내하겠다는, 동반자적 의미가 수반된다. 

 과거 부모님 슬하에 지내던 시절, 우리 집을 거쳐 간 강아지들의 배변훈련 과정을 떠올려봤다. 배변 지역으로 지정한 곳에 신문지를 깔고 훈련을 시작했다. 강아지들이 소변 실수를 하면, 신문지를 돌돌 말아 그 끝에 소변을 살짝 묻혀서 코를 때리면 된다고 했던가. 순간 돌돌 만 신문지로 코끝을 때리던 아빠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겁을 주고 체벌을 강하게 해서 규율에 적응시키는 방식. 그래, 예전에 그렇게 키우던 시절도 있었다.


 요즘은 많은 것이 변했다. ‘반려견 행동 전문가’라는 직업이 생겼고, 꽤 유망하기까지 하다. 많은 애견인이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의 SNS에 수없이 질문을 올리고 전문가적 처방을 기다린다. 나 역시 그랬다. 강아지가 일 년이 다 되어 가도록 용변을 가리지 못할 때, 거절의 의미로 살짝 입질할 때, 사료를 거부하고 간식만을 바랬을 때, 그 사람의 강연과 방송을 찾아보고 저서를 사서 읽었다. 그의 주장은 일관되게 한 가지였다.  강아지도 그 나름의 입장이 있다는 거였다. 거친 행동으로 겁을 줘서 벌벌 떨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강아지의 마음을 읽고 행동을 교정해야 한다는 것이 포인트였다. 

 나도 열심히 연습했다. 강아지에게 안달복달하는 내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강아지가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때까지 기다려줬다. “기다려!”라고 말했을 때 기다리고, “안돼!”라고 하면 머뭇거릴 때 짜릿했다. 녀석과 제대로 교감하는 걸까 설렜다. 물론 이도 저도 안 먹힐 때도 분명 있었다. 그럴 땐 나를 다독였다. 저 녀석이 조금 멍청하거나, 내가 전문 훈련사가 아니기 때문이겠지 라는 생각으로.

 그런 훈련 방식을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개는 개일 뿐이라며, 주인이 허락해주는 세상에 만족하게 해야지 너무 풀어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말했다. 산책도 아예 안 하면 나가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며, 주인이 하기 마련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키우는 사람도 있다. 그저 나와 다를 뿐이다. 그의 방식과 나의 것이 다를 뿐이다.


 아이를 키울 때도 그랬다. 밥을 잘 먹지 않는 아이가 있을 때, 동네 아줌마 한 명이 말을 보탠다. “굶겨. 배고프면 다 먹게 돼 있어. 우리 애들은 안 가리고 잘 먹어. 다 부모 하기 나름 인 거야.” 

 이 말은 틀린 말이다. 굶어도 안 먹는 아이가 있다. 허기를 잘 느끼지 못하거나, 정말로 음식에 관심이 없어서 배고픈 채로 내내 놀다가 쓰러지는 아이를 본 적이 있다. 생명을 기르는 일에 '반드시' '원래'라는 말이 '당연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한 번 굶겨봐. 배고프면 먹을 수도 있겠지. 나는 그랬어.”

 이렇게 말해야 옳다. 경험이 가치있는 것이지, 무조건 먼저 해 본 사람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거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가면, 꼭 인사를 시켜주고 싶다며 자신의 강아지를 내 곁으로 데려오는 사람들이 있다. 가까이 가도 되겠냐고 묻지도 않고.

“다롱아. 인사해. 친구네. 우리 강아지가 친구를 너무 좋아해서요.”라며 다짜고짜 자기 강아지와 내 강아지를 붙여 놓는 거다. 서로 킁킁 냄새를 맡고 경계하듯 뱅글뱅글 돌기도 하다가, 내 강아지가 먼저 컹컹 짖기도 했다. 겁이 나서일 수도 있고 그 강아지가 싫었을 수도 있겠지. 황당하게도, 그 사람은 내 강아지를 보며 한 마디 던진다.

 “개가 조금 사납네요. 아니면 사회화가 덜 됐나? 자주 좀 친구를 만나게 해주세요. 그럼 좋아질 거예요.”라고.

 난 조금 화가 나고 마음이 상했다. 컹컹 짖는 강아지를 진정시키고 산책을 서둘러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냥 자기 개와 다른 개가 다를 수 있다는 건 모르는 걸까? 어떻게 그렇게 자기만 옳고 남은 다 틀렸다는 건지, 신경질이 났다. 

 “당신 개와 내 개는 다른 거예요.”라는 말을 하지 못해서 목구멍이 텁텁했다. 이제 나는 다른 개가 갑자기 내 곁으로 오려고 하면 먼저 말한다.

 “겁이 좀 많아요. 친구 만나는 거 좋아하지 않아요.”


 아이가 어렸을 때, 나는 용감한 엄마가 아니었다. 주변을 신경쓰느라 늘 허덕였다. 용감해지기 위해서는 신념이 필요하다. 다르다는 것은 틀린 게 아니다.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걸 자주 잊는 사람들에겐, 꼭 미리 알림이 필요한 것도 같다. 

 다소 피곤한 일이다. 원래 사는 게 조금은 피곤하기도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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