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파트는 산 끝자락에 위치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춥다. 비 오는 날에는 아파트 정문을 통과하면 숲의 풀 냄새가 가득하고 여름의 초록빛은 마치 전원주택의 앞마당을 옮겨 놓은 듯 한 요즘 말로 산세권 프리미엄을 한껏 누릴 수 있는 그런 아파트다.
하지만1999년에 완공된 20년이 넘은 아파트로 승강기 역시 오래되었다. 요즘 들어 자주 고장이 나고 점검하는 일이 많아졌다. 16층에 사는 나는, 점검 중인 승강기 탓에 원하지 않은 운동도 하곤 했다.
나이가 들면서 새벽잠이 없어지고 초저녁 잠이 많아졌다. 새벽에 눈을 뜨면 할 일이 없어 핸드폰을 보거나 소리 줄여 TV를 보곤 했다. 새벽잠이 없어지면서 깊은 잠을 들기 힘들었고 무서운 것을 보거나 공포영화를 보면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
핸드폰으로 너튜브를 보던, 그러던 어느 날 무의미하게 보내는 이런 새벽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새벽에 신선한 산 공기를 마시고 싶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시간은 4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잠자리를 정리하고 운동복으로 갈아 입고 문을 열고 승강기 버튼을 눌렀다. 한 여름의 미명은 푸른빛을 가지고 있다. 승강기 문이 열리고 환한 불빛이 반겼다. 1층을 누르자 승강기는 스르르 밑으로 움직였다. 가끔 내려가면서 덜컹 소리를 내지만 큰 무리 없이 1층까지 내려왔다. 아파트 동 입구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마스크를 쓰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허겁지겁 입을 막으며 다시 승강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직 푸른 새벽의 아파트는 고요했다.
2. 멈춰버린 승강기
승강기는 그 사이에 7층에 멈춰있었다. 나는 올라가기 위해 오름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고 있었다. 승강기는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짜증이 났다. 띠~~ 띠~~ 소리가 났다. 승강기를 잡고 있으면 이런 소리를 낸다. 7층에서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승강기를 잡고 있는 것이다.
"이 새벽에 무슨 일이야!!"
"이그.. 내 복에 무슨 새벽 운동이야" 이렇게 짜증이 났다.
마스크를 잊고 나온 내가 더 미웠다.
조금 전에 동 입구 문을 열어선지 여름 산안개가 밀려들어왔다.
한참 띠~~ 띠~~ 소리를 내다가 승강기는 이제 움직이기 시작했다. 띵똥.. 하면서 1층 내가 서 있는 곳에 멈춰 섰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누군지 얼굴을 자세히 보고팠다. 이 새벽 시간에 이렇게 늦게까지 승강기를 잡고 있었던 그 인간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얼마나 많은 짐을 싣기에... 항의도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토록 시간을 잡아먹던 많은 짐을 확인하고 싶었다.
3. 검은 옷의 여자
드디어 승강기 문이 열렸다. 깜빡깜빡. 내가 내려올 땐 멀쩡하던 승강기 불빛이 깜빡거린다. 검은 옷을 입은 깡 마른 체구의 여자가 검은 레이스 모자를 눌러쓰고 검은 마스크를 착용한 채 서있다. 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위에 있는 승강기 불은 고장 난 듯 깜빡이고, 온통 검은색의 여자가 나를 쳐다보고 서 있다.
숨이 턱!!! 막혔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다리에 힘이 쭉~~ 욱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잠시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여자가 내릴 시간을 주기 위해 승강기 문 앞에서 기다렸지만 검은 옷의 여자는 내릴 생각이 없는지 아무렇지 않은 듯 그렇게 서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승강기 내부 손잡이를 잡으며 들어갔다. 16층 버튼을 누르고 여자의 반대편 끝 구석에 웅크리듯 서 있었다.
숨 막히는 시간이 적막하게 흐르고 있었다.
난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16층 불이 빨리 들어오길 간절하고도 간곡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검은 옷의 여자는 자신이 내릴 층수 버튼을 누르지도 않고 있었다. 난 "이거 뭐야?"를 속으로 외쳤지만 입은 벙어리였다.
4. 엘리자를 위한 발라드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르고... 띵똥. 얼마나 기다리던 소리였던가. 16층에 도착했다는 승강기의 반가운 알림 소리..
난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여 승강기에서 나올 수 있었다.
집 도어록 비번을 누르는데 갑자기 비번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매일 몇 번을 누르던.. 눈감고도 누를 수 있던 그 번호.
그 검은 옷의 여자는 닫힘 버튼을 누르지도 않고 승강기 문이 닫히길 기다리는 듯했다.
비번은 생각나지 않고 승강기 불빛은 푸른 새벽어둠을 비추고 내 다리는 또 풀려버렸다. 할 수 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띠~리리리리리리리링 띠리리~ 띠리리 (우리 집 초인종 벨소리는 엘리자를 위한 발라드다)
5. 시작된 악몽
초인종 벨소리가 16층 전체를 깨울 즈음 승강기 문이 닫히고 집안에서 코 골고 퍼져있을 남편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다시 푸르스름 새벽어둠이 나를 둘러쌓자 비밀번호가 떠올랐다. 헐레벌떡 비번을 누르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심장은 밖으로 뛰쳐나올 것처럼 나대고, 콧잔등에 땀이 송글 송글 맺혔다. 새벽 운동이고 뭐고 다시 운동복을 벗어던지고 침대에 몸을 던지고 인견 이불을 끓어 안았다.
아직도 그 검은 옷의 여자가 뒤에 서 있는 듯했다.
다시 인견 이불을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도대체 그 여자는 누굴까? 분명 7층에서 머물러 있던 승강기를 타고 내려왔는데...
왜 1층에서 내리지 않은 걸까? 그 여잔 왜 7층에서 승강기를 그토록 오래 잡고 있었던 걸까? 짐도 아무것도 없으면서.. 나처럼 뭘 잊어서 다시 올라간다면 분명 7층에서 내려야 하는 게 아닌가? 근데 왜 내가 내린 16층보다 더 올라가는 걸까? 자기가 내릴 층수를 모르는 걸까?
왜 그런 시커먼 옷에 검은 레이스 모자에 검은 마스크까지... 온갖 무서운 생각이 연이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경험을 생전 처음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