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 목화밭의 일꾼.
내 인생의 첫 챕터를 '회사원'이라는 이름으로 넘긴 지 어언 1년.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내 머릿속은 깨끗하게 포맷된 하드디스크 같았다. 저축? 그게 뭐죠? 먹는 건가요? 인생 계획? 그런 거창한 건 드라마 주인공들이나 세우는 거 아니었나?
365일, 24시간 내 귓가에는 고객님의 감미로운(?) 클레임이 BGM처럼 깔려 있었고, 해가 뜨는지 지는지도 모른 채 모니터만 바라보던 나에게 '계획'이란 사치였다. 내 유일한 소원은 '제발 하루만... 딱 하루만 기절하게 해 주세요'였으니, 말 다 했지.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건 완벽한 사육, 아니, '전략'이었다. 옛날 옛적, 드넓은 목화밭의 농장주들이 이런 식으로 노예들을 다뤘다지? 동틀 때부터 해 질 녘까지 영혼이 탈출할 때까지 일을 시키고, 저녁엔 배가 터지도록 맛있는 음식과 신나는 음악을 선사하는 거다. "캬, 역시 우리 주인님이 최고야! 내일도 파이팅!" 뭐 이런 마음이 절로 들게 말이다. 가끔 던져주는 달콤한 휴일은 ‘주인님을 향한 무한한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특효약이었을 테고.
“자, 다들 고생했어! 오늘은 회식이다! 꽃등심 먹으러 가자!”
팀장님의 우렁찬 외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방금 전까지 좀비 같던 동료들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치이익- 불판 위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한우! 우리는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먹고 마셨다. 반도체 엔지니어가 아니라, 목화밭에서 갓 돌아온 일꾼들처럼. 이상하게도 우리 회사 회식 메뉴는 치킨이나 삼겹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회식비만큼은 우주처럼 무한했거든. 언제나 스타트는 최고급 한우, 아니면 펄떡이는 활어회였다.
그렇게 위장에 기름칠을 하고, 노래방에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비틀거리며 기숙사 침대에 쓰러져 잠들면 완벽한 하루의 끝. 크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나 달콤한 덫이었다. 난 완벽하게 당했다!
2화. 뇌가 ‘노예 모드’로 부팅되었습니다.
시간은 흘러 입사 5년 차. 어느 날, 은행에 들렀다가 창구 직원의 질문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객님, 예금으로 하시겠어요, 적금으로 하시겠어요?”
“... 예? 그게... 다른 건가요?”
내 대답에 직원은 ‘이 사람 뭐지?’ 하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친절하게 설명했지만, 내 귀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펀드? 주식? 그건 또 어느 나라 외계어란 말인가. 그 순간, 번개가 머리를 내리쳤다. 아, 나 진짜 바보처럼 살았구나!
생각해 보니 동기 중 몇몇은 벌써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느니, ‘주식으로 짭짤하게 벌었다’느니 하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동안 나는 뭘 했지? 아, 맞다. 소고기 먹었지. 소고기... 원 없이...
이보시오, 동지들! 혹시 당신도 나와 같은 과는 아닌가? 회사가 차려주는 저녁 밥상에 행복해하며 통장 잔고는 들여다볼 생각도 안 하고 있지는 않느냔 말이다. 정신 차려야 한다! 지금 당장 당신의 금전 계획과 경력 계획을 A4 용지에 써 내려가야 한다. 필요하다면 영혼까지 끌어모으고, 빚을 내서라도 부동산에 깃발이라도 꽂아 놔야 한다고!
만약 이 글을 읽고도 “에이, 설마~”하며 웃어넘긴다면... 당신은 진짜 혼나야 한다. 축하한다. 당신의 뇌는 이미 ‘최신형 노예 모드’로 완벽하게 세팅되었으니. 자, 이제 그만 그 달콤한 한우의 꿈에서 깨어나자. 우리 뇌에 ‘부자 주인님 모드’ 최신 버전을 설치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