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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무도회

by 뚜벅초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사귀보다 바닥에서 구르는 낙엽이 더 많은 계절이 왔다.

숲속 카페에서 따뜻한 밤 크림을 얹은 가을 한정 음료를 마시며 엄마곰과 아빠곰은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해가 짧은 요즘이라 퇴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인데 벌써 밤은 컴컴했다.

버미는 친구들과 함께 놀이터에서 놀고 있을 것이고, 주방에서는 곰철이 달그락거리며 설거지를 하는 소리가 기분좋게 들렸다.


그때 온 몸의 털이 쭈뼛 서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아아악!!!"

외마디 비명이었지만 듣는 순간 모두가 확신했다. 버미에게 무슨 일이 생겼구나.

엄마곰과 아빠곰은 즉시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던 곰철까지 행주를 던지고 따라나섰다.


그때 버미의 친구 꼬마녀석들이 엉엉 울며 달려왔다.

"아줌마 아저씨! 버미가..버미가 잡혀갔어요!"

"갑자기 이상한 아저씨가 나타나서 버미를 그물에 넣고 잡아갔어요!"

"너무 무서워서 그냥 와버렸어요..죄송해요...."


그 순간 곰철의 머릿속에 스치듯 어떤 직감이 떠올랐다.

누구에게나 별 합리적인 이유 없이 어떠한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직감은 제법 잘 맞아떨어진다. 곰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밀렵꾼이 찾아온 게 틀림없어..." 아빠곰이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빨리 차를 타고 쫓아가자. 난 전화로 기린 아저씨에게 전화할게." 엄마곰이 말했다. 기린 아저씨는 마을 경찰서에서 일하는 경찰관이다.

"저...나도 같이 가도 되겠나." 곰철이 말했다.

아빠곰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엄마곰이 타고, 뒷자리에는 곰철이 탔다. 곰철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아이들이 말한 방향을 따라가니 역시나 수상한 트럭이 보였다. 트럭의 뒤에는 자물쇠로 잠긴 낡은 철제 상자가.

트럭이 내린 곳을 따라 들어가니 역시나 철 상자 안에서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우우...무서워...엄마..아빠..."

버미는 겁에 질려 발길질 한 번 해 볼 생각도 못 한 채 상자 안에 웅크리고 울고만 있었다.


"버미야!"

엄마곰이 울면서 상자를 두들겼다.

그때 분노한 아빠곰이 두툼한 앞발로 상자의 자물쇠를 크게 내리쳤다. 다행히 자물쇠는 금새 부러졌고, 버미가 바들바들 떨며 나와 엄마곰 품에 안겼다.

"엄마!"

"버미야, 많이 무서웠지..이제 괜찮아."

버미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아빠곰은 조금 안심이 되었으나 여전히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내 아이를 이런 무서운 곳으로 끌고 간 놈을 당장 응징해야 할 터였다.

컴컴한 동굴 안은 불빛이 없이는 도저히 앞을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디선가 역한 피비린내가 나는 것도 같았다.


곰철의 발 밑에 뭔가 떨어져 있었다. 랜턴이었다. 곰철은 랜턴을 켜서 주변을 마구 비춰 보았다.

그때.....

벽에 걸려 있는 무언가를 보고 만 것이다.

그것은, 갈색의 털이 잔뜩 나 있는, 축 늘어진 가죽의, 그리고 그 위에는 눈을 꼭 감고 있는 한 얼굴..동그란 귀가 보였다.

곰철이 몇 년째 꿈에서도 만나지 못하고 애타게 그리워하던 얼굴,

메리였다.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곰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눈으로 두 아기곰을 바라보고

은퇴 후에는 세 아기곰 손주들이 오는 날을 기다리며 맛있는 밤 케익을 굽던 메리는

이제 저 곳에 뼈와 살이 발라진 채 차가운 가죽만이 남은 모습으로 박제가 되어 있었다.


"으악! 메리!"

곰철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자리에 쓰러져 혼절해 버렸다.

"교수님!"

아빠곰이 얼른 곰철을 부축했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빠곰이 분노로 울부짖는 소리가 동굴을 잔뜩 메웠다.


"아이 씨, 시끄러워, 뭐야? 누가 또 죽고 싶어서 제 발로 기어 들어왔어?"

그리고 탄창을 장착하는 소리.

놈이었다.

아빠곰이 분노로 붉게 물든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네가, 사모님을 죽인 것도 모자라서 우리 아들까지...!"

"뭐야, 누가 말을 하는거야? 설마 곰이..말을 해?"

"그래! 우리는 네가 마음대로 재미삼아 죽여도 되는 존재가 아니다. 너처럼 생각도 하고 말도 한다고! 네가 남의 목숨을 빼앗았으니 너도 대가를 치를 준비를 해야겠지!"

아빠곰이 앞발을 들어 그를 내리치려는 순간-


"잠깐!"

엄마곰이 멈춰세웠다.

"여보, 정말 화나지만...저 인간과 똑같이 되진 말자..."

"아빠, 무서워...집에 가요..."

버미가 바들바들 떨며 엄마 품에 안겨 말했다.


탁!

아빠곰이 앞발을 내리쳤다.

그러나 앞발이 내려간 곳은 밀렵꾼의 얼굴이 아닌 그가 들고 있던 총이었다. 총은 순식간에 바닥에 떨어져 두 동강이 났다.

"으...윽...!"

그 때 동굴 밖에서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났다. 기린 아저씨의 경찰차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 뒤로 밀렵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숲속마을 주민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소문에는 인간 경찰서로 인계돼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곰이 자신에게 말로 협박을 했다'고 증언해

심신미약이 인정되어 감형을 받았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밀렵꾼의 근황에 크게 관심을 갖는 이는 없었다.

숲속마을의 주민들은, 늘 그랬듯이-다른 사람을 벌하는 것보다-지금 여기서, 소중한 사람들과 내가 행복해지는 것에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다만 동굴에서 차갑게 이슬을 맞고 있던 메리의 시신을 인계한 곰철은 마을로 돌아와 그녀를 위한 늦은 장례를 치렀다.

장례식에는 곰철의 자녀들과 손주들, 버미네 가족들, 기린 아저씨,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참석해 엄숙한 가운데 진행됐다.

부쩍 수척해 보이는 곰철은 느릿느릿 그녀가 좋아했던 노란 수선화를 한가득 그녀의 옆에 가져다 놓았다.

멧돼지 스미스 씨가 특별히 제작한 관 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메리의 표정이 어쩐지 평온해 보였다.

"여보...잘 가게.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

곰철의 가족들과 주민들이 훌쩍이는 소리를 뒤로 하고 메리가 담긴 관의 뚜껑이 조용히 닫혔다.


그날 밤, 곰철은 아주 오랜만에 꿈에서 메리를 만났다.

대학 시절 메리와 파트너로 처음 참석한 파티장이었다.

서투른 솜씨로 한껏 꾸민 메리와 곰철은 쑥스럽게 미소지으며 손을 잡고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살랑살랑, 수선화처럼 샛노란 메리의 드레스 자락도 함께 춤을 췄다.


노래가 끝나자 메리는 곰철에게 말했다.

"곰철, 알고 있지? 이제 파티가 끝났으니 난 돌아가야 해."

"메리,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될까"

메리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안 돼. 내가 가야 할 곳이 있어. 언젠가는 너도 오게 될 거야. 그 동안 카페도, 숲속마을도 잘 부탁해."

"...메리, 너도 다 알고 있었구나."

"물론이지, 그리고 버미네 가족들한테도 고맙다고 꼭 전해 줘."



"메리, 잘 가. 또 만나."


사본 -ChatGPT Image 2025년 9월 22일 오후 01_51_16.png 사진: 챗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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