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평화로운 숲속마을...이지만, 오늘 아침은 뭔가 시끄러운 소리로 시작됐다.
양 부부의 식료품점 옆에 못 보던 가게가 하나 들어서는 모양이었다.
정신없이 진행되는 공사판의 한켠에는 못 보던 낯선 곰 한 마리가 커피 머신이며 책 꾸러미를 들고 분주하게 오갔다.
덩치는 아빠곰과 비슷할 정도로 크지만, 얼굴을 보아하니 나이가 꽤 있는 곰이었다.
공사장에 자욱했던 흙먼지도 가라앉고,
며칠이 지나자 산뜻한 카페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품위있는 목재로 잘 짜여진 카페의 간판에는 'Cafe Forest'라는 이름이 단정하게 쓰여 있다.
카페 포레스트, 그러니까 숲속 카페는 오픈 첫 날을 기념해서 숲속마을 주민들에게 커피(혹은 음료)를 한 잔씩 무료로 주기로 했다. 서비스로 달콤한 사과절임 파이도 한 조각씩 줬다.
휴일을 맞아 집에서 느긋한 하루를 보내고 있던 버미네 가족도 카페를 찾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은 버미의 아빠곰이 카페 사장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정체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곰철 교수님? 교수님이 왜 여기에!"
"어? 자네는..?"
"네! 교수님, 대학 때 교수님 수업 들었던 제자입니다. 그런데...카페를 여신 거에요? 그것도 우리 동네에?"
"허허. 그렇게 됐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지. 자네는 벌써 결혼해서 가정도 꾸리고 이렇게 예쁜 아이도 있구먼!"
버미가 엄마곰 옆에서 씨익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네. 교수님 그때 기억 나세요? 졸업하기 전 저한테 공부 더 하시라고 대학원 진학도 권하셨잖아요."
"그렇지, 근데 자네는 공부보다 고향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거절했고. 그래, 그때 하려던 일은 어떻게 잘 됐나?"
아빠곰은 씨익 웃으며 "네. 물론이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소방곰으로 일하고 있어요."
곰철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소방곰! 소방곰을 하려고 그랬구나. 정말 대단하네 자네."
"하하, 그나저나 교수님도 어쩌다 여기까지 오시게 된 건가요. 카페까지 차리고선."
"그게... 우리 아내가 숲을 참 좋아했어. 아내가 은퇴하고 나서 조용한 곳에서 지내고 싶다고 해서 잠시 괜찮은 곳을 돌아다니다가 여기 숲에서 몇 달 정도 지내기로 했지. 그러다가 아내가 먼저 떠났고, 나도..이 숲이 좋아서 교수직은 그만두고 카페를 차리기로 했네. 참 무모하지 않나 하하."
"아....사모님이..그러셨군요."
"아니, 내 정신좀 봐. 이런 귀여운 꼬마손님이 왔는데."
곰철은 재빠르게 주방으로 가서 케익 한 조각을 내와 버미 앞에 내려놓는다. 향긋한 치즈 케익엔 달콤한 꿀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다.
"이건 우리 아기곰들이 참 좋아하는 꿀치즈 케익이라네. 특별 선물로 줄게요~"
"와아! 고맙습니다!"
버미는 입에 잔뜩 꿀을 묻힌 채 와구와구 케익과 주스를 먹는다.
모두가 떠난 카페에는 차가운 달빛만이 내려앉는다.
곰철은 테이블과 의자를 하나하나 행주로 꼼꼼히 닦다가 가게 한켠에 놓인 액자 앞에 다가선다.
그곳에는 할머니곰 한 마리가 미소를 짓고 있다. 액자 앞에는 노란 꽃다발이 놓여 가게 전체에 은은한 향기를 전하고 있다.
"여보, 나 카페 열었는데 어때? 제법 잘 하지? 오늘은 손님 중에 무려 내 제자도 있었어. 수업시간에 졸기도 하던 녀석이었는데 벌써 결혼해서 예쁜 아기곰도 뒀더군. 하고싶은 일도 하고 말이야. 난 참 제자 복이 있는 것 같아."
곰철은 액자 속 얼굴을 앞발로 한 번 쓰다듬는다.
"당신이 그렇게 갑자기 떠나버릴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빨리 일을 그만두고 여기서 이렇게 커피 내리면서 당신이랑 더 오래 같이 있었어야 했는데. 그놈의 일이 뭐고, 연구가 뭐라고..참.."
곰철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
수 년 전 어느 늦가을 밤.
그날도 곰철은 늦은 밤까지 연구실에서 퇴근하지 못한 채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그의 아내 메리는 거실에서 남편을 기다리며 책을 읽다가 잠시 바람을 쐬러 문 밖으로 나섰다.
문 밖에는 차가운 밤 공기와 컴컴한 나무 그림자밖에 없었다. 메리는 어깨에 두른 두툼한 숄을 좀 더 여미며 걸음을 재촉했다.
다시 돌아 집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서늘한 올무가 메리의 온 몸을 휘감았다.
메리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발을 마구 휘둘렀지만 이미 기운이 떨어진 몸으로 사냥 도구를 찢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뒤늦게 일을 마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곰철.
"여보, 미안해요. 오늘은 일찍 들어오려 했는데... 끝까지 날 괴롭히는 문제가 하나 있어서 말이야. 대신 당신이 좋아하는 밤 케익 사 왔어요. 여보? 어디 갔어?"
메리가 늘 앉아있던 자리에는 펼쳐놓은 책과 아직 식지 않은 미지근한 차가 놓여 있었다.
어쩐지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곰철은 집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메리가 늘 두르던 숄이 바닥에 떨어져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구르고 있는 모습과, 날카로운 사냥 도구가 땅에 끌린 흔적, 그리고...메리가 최후까지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친 흔적을 보고 말았다.
"메리......"
곰철은 밤 케익을 땅에 떨어트린 채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케익은 차가운 돌 위에 밤 크림을 묻히고 데굴데굴 굴렀다.
곰철의 카페는 제법 성공적이었다.
마을 유일의 카페로, 맛있는 커피와 디저트가 늘 먹고 싶었던 숲속 주민들은 카페를 참새 방앗간처럼 들렀다.
그 중에는 옛 제자인 버미 아빠와 그의 아들, 엄마곰도 있었다.
오늘도 곰철은 버미네 가족이 오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새로운 메뉴를 서비스로 내왔다.
"자, 이건 서비스라네. 새로운 메뉴로 할 지 고민 중인데, 먼저 먹어보고 맛을 알려주면 고맙겠네."
"어머, 교수님 매번 이렇게 서비스를 주셔도 괜찮은 거에요?" 엄마곰이 말했다.
"하하, 자네들 가족 보면 나랑 우리 아내 젊었을 때 생각이 나서 그래."
미국 유학 시절 동양에서 온 유일한 곰이었던 곰철은 늘 혼자였다.
그나마 덩치가 컸기에 누군가 대놓고 무시를 하거나 괴롭히진 않았지만, 언제나 혼자서 공부를 하고 식사를 했다.
그 날도 언제나처럼 혼자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으려고 앉았는데, 누군가가 다가왔다.
"Hi. Do you mind if I sit here?(여기 앉아도 될까?)"
부드러운 털결, 상냥한 목소리, 그녀가 바로 메리였다.
그렇게 둘은 함께 공부를 하고 식사를 하고 때론 교정을 거닐면서 치열한 학문적 토론을 펼치기도 하는 사이였다가, 미래를 약속하는 사이가 됐다.
곰철이 고국으로 돌아가 교편을 잡을 때도 기꺼이 동행했던 메리.
둘은 -이제는 장성한-남매곰 둘을 낳고, 키워서 손주 세 마리를 보기도 했다.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먼저 떠나버린 아내 메리를 생각하며-
언젠가 이 생명이 다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걸릴 지 알 수 없는 그 시간을 이 카페에서 기다리겠다고, 곰철은 생각했다.
그 날 밤, 버미의 비명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