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아는 걸 임신 전에 알았더라면
나의 육아우울증 극복기 22
다시 태어난다면, 아니 좀 더 욕심을 낮추고 10대 때나 20대 초반으로 돌아간다면, 할 수 있는 게 아주 많을 것이다. 좀 더 열심히 공부를 하고, 수학을 포기하지 않고, 용기내서 재수를 해 보고, 어쨌거나 취업이 잘 되지 않는 그 전공을 선택하지 않고 좀 더 취업이 잘 되는 다른 전공을 선택하고, 서른이 되기 전 특이한 색깔로 염색을 해보고, (코로나가 오기 전) 좀 더 먼 곳으로 여행을 다니고....
지금 가지고 있는 정보와 경험들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정말 '백 점 만점'짜리 인생을 살 것 같은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자주 하던 상상이었지만,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어 180도 달라진 삶을 마주하니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탄식을 더 자주, 깊이, 절실하게 하게 된다. 엄마가 되기로 결심하기 전 지금 아는 것들을 알았더라면, 정말로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텐데. 어쩌면 육아우울증을 심하게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이미 지나가 버린 세월을 어찌할 수 없으니, 사람들은 '과거'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주변의 젊은이들이나 자신보다 경험 단계가 낮은 사람들, 이를테면 학생이나 사회 초년생이나 신혼부부나 예비 부모들, 자녀나 제자, 부하 직원들에게 '내가 해보니까 말이야~'로 시작하는 조언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이미 그 단계를 거쳐본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사자가 요청하지 않은 한 대부분의 조언은 그냥 '꼰대질'로 패싱돼 버리기 마련이다.
당연히 그들은 조언을 하는 사람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가 처한 입장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당연히 결과도 다를 것이다. 나에게 더없이 만족스러운 결과는 남에게는 후회와 상처로만 남을지도 모른다. 내가 임신 전 '아이를 일단 낳으면 너무 행복해서 모든 고통을 잊게 될 것'이라는 조언을 숱하게 들었지만 그게 나에게는 그리 해당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멘붕에 빠졌던 것처럼.
따라서 나도 이 글을 '과거의 나를 만난다면' 정도로 전제하고 쓰려고 한다. 감히 임신출산을 계획중이거나 고민중인 다른 이들에게 단지 내 경험일 뿐인 것을 어설프게 강요하고 싶지 않다.(물론 그래도 선택 과정에서 이런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참고해 주신다면 감사할 것이다...)
1. 결혼 후 (임신하지 않은 상태의) 신혼 기간은 최소 1년 이상 가질 것이다. 나는 결혼식 2달 후 임신사실을 확인했는데, 당시는 좀 아쉽긴 해도 '나이가 적지 않으니까 잘 된 일'이라는 주변의 말에 애써 합리화를 했던 것 같다. 다행히도 나는 임신 중 이벤트가 없었고 입덧도 거의 하지 않아서 나름대로 신혼생활을 즐기는 데 별 무리가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짧은 신혼기간이 내 육아우울에 어느 정도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남편 또한 갑자기 유부남으로 신분이 바뀐 데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아빠' 역할까지 떠맡게 돼 혼란이 많았을 것이다. 고맙게도 그 스트레스를 나나 아기에게 푼 적은 없었지만.
2. 임신 전 체력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고 만반의 준비를 할 것이다. 사실 나도 머리로는 알고 있는 부분이었지만 바쁜 직장생활에 쫓겨 운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모두들 강조하듯이 육아에는 체력이 기본이고, 내 경우에는 임신 때부터 안 좋아졌던 허리 통증이 아직까지 계속되는 중이다. 다시 돌아간다면 체계적인 PT를 받아서라도 근력을 키우고 자세 교정을 해 임신, 출산, 육아에 필수적인 기초체력을 만들어둘 것이다.
3. 출산 후 최소한 100일까지는 절대 혼자 육아하지 않고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조리원을 나온 후 정부보조 산후도우미를 고용해서 2주 정도 도움을 받으려 했으나 도우미분의 도가 지나친 간섭과 훈계로 결국 도중에 해고하고 열흘만에 (남편이 출근한 날은) 나홀로 육아에 투입됐다. 물론 순한 아기들은 신생아 시기에는 거의 잠을 자기 때문에 오히려 육아가 수월한 경우도 있으나 우리 아기를 비롯한 대다수의 안 순한 아기들은 이 시기가 가장 힘들고, 산모 스스로도 몸이 회복되지 않아 고된 육아노동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리하게 혼자 육아를 하느라 산후 회복도 늦어졌고, 무엇보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쌓여 뒷날 육아우울로 번지게 된 게 아닌가 싶다. 당시에는 이제 엄마가 됐으니 어떻게든 아기를 혼자 보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애 봐준 공은 없다'는 말처럼 무리하게 육아를 혼자 해낸다고 해서 누가 상 주는 것도 아니고 알아주지도 않는다. 혹시 이 글을 보는 예비부모가 계시다면, 여건이 된다면 양가 도움을 받아 조리를 하거나 입주도우미를 쓰는 걸 추천하고 싶다.
4. 부부 외에도 육아를 도와주실 분이 최소 2명 이상은 확보돼야 한다. 임신 전에는 막연하게 아이 하나 정도는 어른 하나가 충분히 키우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한 명의 아이를 키우는 데는 적어도 건강한 성인 3명 이상이 필요하다. 여기에 일반적으로 부부 중 한 사람은 경제활동을 하느라 집을 자주 비우니 스페어 인력이 1명 이상 필요하고, 이 분이 스케줄이 안 될 때를 대비해 2인 이상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더욱 그렇다.
5. 엄마가 된다고 해서 '불가사의한 신묘한 능력' 같은 게 뾰로롱 생겨나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런 거 믿지 말고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런 능력이 일어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아니었다. 그냥 뼈를 깎는 노력과 인내, 고통을 겪다 보면 익숙해지고 조금씩 아이가 자라면서 수월해질 뿐이다. 목숨이라도 아깝지 않은 모성애도 사실 사람 나름이다.
6. 엄마가 되면 일단 '오롯이 나 자신만을 위한 것'들은 수 년 후로 미뤄야 하기 때문에, 되도록 임신 전에 모든 '버킷리스트'를 다 완수한 후 임신을 시도할 것이다. 당장 임신만 해도 먹을 수 있는 게 크게 제한되며 장거리 여행도 어려워진다. 경력 단절도 감수해야 한다. 나는 운이 좋게 별 일 없이 1년 넘는 육아휴직을 쓰고 복귀하게 됐지만 만약 임신 중 내 건강상태가 심하게 안좋아졌다면? 직장에서 내 휴직을 반려했다면? 사표를 썼을 가능성도 높다. 더군다나 공부나 취미활동 같은 부가적 행동은 아예 미뤄진다. 우리 부부는 실제로 아기 출산 이후 취미생활은 모두 접었고 간단한 운동조차 할 시간이 없어 실시간으로 몸무게 신기록을 경신 중이다. 임신 전으로 돌아간다면 하고 싶었던 공부나 취미활동을 더 열심히 해 보고, 더 이상 속세(?)의 일들에 욕심이 없어져 이제 오롯이 아이를 키우는 삶에서만 재미를 찾아도 된다 싶을 때 임신을 시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