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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허실 Dec 18. 2020

수평적인 조직은 없다

조직 운영과 리더십

대안교육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2004년이다. 청소년 시절부터 졸졸 좇아 다니던 문화예술 선생님의 소개로 3개월 동안 동네의 작은 대안학교에서 풍물을 가르쳤다. 그 당시 수업을 하기 위해 학교를 처음 방문했을 때 받았던 문화적인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교실 안과 밖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서로 반말을 하며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직접 대면한 수평적인 조직 문화였다.


자원교사 경험이 계기가 되어 전역 후 2년 동안 인근의 다른 대안학교에서 1주일에 한 번씩 연극 강사를 하다가 대학 졸업 후 바로 대안학교 교사가 되었다. 대부분의 대안학교는 평등한 문화를 사랑하고 이런 문화가 학교 전반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일하던 대안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교사회의 경우 1년 차든 10년 차든 모든 교사의 월급은 동일했고 역할만 다를 뿐 직급도 없었다. 교사의 발언권도 정도의 차이는 조금 있었지만 경력 구분 없이 똑같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이었다.


요즘 IT 스타트업을 포함해 일부 대기업의 경우에도 수평적인 조직을 만들기 위해 별명을 부른다고 하는데 대안학교에서는 이미 초창기부터 그런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말 그대로 굉장히 수평적인 조직이었는데 십 년의 경험을 돌아보면 수평적인 조직은 장점과 한계가 분명했고 지금 돌아보면서 정리한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수평적인 조직은 없다.


수평적인 조직이 제대로 된 문화로 자리 잡으려면 한 가지 전제가 꼭 필요하다. 조직에 속한 구성원의 변화가 크지 않아야 한다. 수평적인 조직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끼리 신뢰 관계가 쌓야 하는데 신뢰를 쌓는 것은 짧은 순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에 나오는 것처럼 오래 보고 자세히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기간이 제법 길어야 한다.


하지만 도시라는 환경 속에서 하나의 조직에 오래 머무르며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지리적으로 모여 살며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지역의 소규모 마을이라면 가능할 수 있지만 도시에서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조직의 구성원이 수시로 바뀔 수밖에 없다.


구성원이 수시로 바뀌는 조직에서 수평적인 조직을 유지하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이런 구조 속에서 수평적인 조직은 의사결정 구조가 명확하지 않은 한계를 드러나는데 이럴 때 결국 일잘러든 일중독자든 몇몇의 영혼을 갈아 넣어야 조직이 유지된다. 이런 이유로 수평적인 조직을 지향하는 시민단체, 비영리단체, 협동조합 등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은 번아웃이 일찍 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조직 문화를 생각할 때 '수직적'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수직'과 '수평'은 힘의 방향일 뿐 그것 자체로 가치 판단을 할 수 없다. 다만 우리 사회가 꽤 오랜 기간 동안 '가부장제'라는 권위적인 문화의 폐해 속에서 살다 보니 '가부장제'의 일부 요소인 '수직적인 관계'에 대해서 오해하는 부분이 생긴 것 같다.  

수직적인 관계 X 수평적인 문화 = 공평한 조직


수직적인 조직은 결정에 대한 책임과 일의 권한이 명확하기 때문에 일의 효율이 높다. 반면 수평적인 조직은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고 감정을 배려하기 때문에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일의 효율을 높이고 구성원과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두 가지 시스템을 함께 가져가야 한다.  


그리고 조금 다른 면에서 보면 인간의 본능과 사회화 과정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완벽하게 수평적인 조직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수평적인 문화를 강조하다 보면 오히려 관계의 왜곡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적당히 수직적인 관계에서 구성원의 직급에 차이 없이 공평한 룰을 적용시키는 것이 조직을 오래오래 재미있게 유지할 수 있는 좋은 방법 같다.




그동안 조직 안에서의 지난한 관계에 지쳐서 이번에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1인 창업에 도전했다. 나 혼자 생각하고 나 혼자 결정하는 것이 처음에는 매우 신났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생각한 것에 대해 누군가와 의견을 교환할 수 없다는 부분은 일의 어려움과 함께 정서적 외로움으로 다가왔다.


혼자 일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관계 속에서 혼자 일할 때나 즐거운 사실이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닫다니, 아직배울 것이 정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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