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버트 에델펠트
사랑하는 이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공동의 주제나 취미가 있나요?
공감과 공유하는 연인들의 마음을 새로 연결해 준답니다. _매일 그림, 날마다 여행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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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미술 기법, 역사적 배경 등 일체의 객관적 사실을 배제한 하루키의 감각과 추상표현으로 쓴 감상입니다.)
+ 하루키 감상
1884년 서른 살이 된 에델펠트. 몇 차례 파리 전시회를 열었고 유명세를 얻기 시작합니다. 파리의 부르주아들은 에델펠트 스타일에 반해 초상화 주문이 쇠도 하였습니다. 에델펠트는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1년의 반은 파리. 반은 핀란드 포르보 근처 하이코 해안 별장에 머무릅니다. 하이코 해안은 핀란드에서 가장 특별한 빛이 있는 곳입니다. 하이코 해안에서 그린 플레네plein air(야외에서 그리는 풍경화)는 핀란드 어느 곳에도 볼 수 없는 빛의 풍경이 펼쳐진 이상적 풍경화란 생각을 합니다.
1884년 여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개인전에 에델펠트보다 열 한살이나 어린 시벨리우스*가 찾아옵니다.
* 시벨리우스(1865-1957)는 핀란드의 대표적 국민음악 작곡가. 당시 핀란드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19세기말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에서 민족주의 색채가 강했습니다. 초기 시벨리우스는 베토벤과 고전주의 경향을 띠었고, 세련된 형식미와 주제, 아이디어의 유기적인 발전을 보였지만, 점차 내성적 표현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시벨리우스는 음악이 성숙해짐에 따라 독일 후기낭만파 음악 스타일, 북구의 어두운 하모니, 조국의 민속적 리듬을 가미시킵니다. 또한 핀란드의 향토성도 강하게 드러납니다. 그의 음악에는 북극 자연환경에 대한 묘사, 러시아로부터 압박에 대한 저항. 비애와 우수가 나타납니다.
처음 보는 소년, 아니 청년. 엣띤 모습의 시벨리우스는 자신을 핀란드의 그리그*라 소개합니다. 에델펠트는 당돌한 청년의 소개에 당황했지만, 이어지는 말에 큰소리로 웃고 말았습니다.
"저는 당신의 그림을 보고 핀란드인으로서 자긍심과 민족성을 자각했습니다. 꼭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Sun taidetta katsoessa tunsin ylpeyttä ja oman kansan identiteetin – suomalaisena. Halusin tosi paljon tavata sut."
* 스칸디나비아를 대표하는 노르웨이의 작곡가 그리그(1843-1907). 초기 그리그는 독일 낭만주의 스타일로 작곡하다 점차 민족주의 색채를 띠게 됩니다.
북국의 쇼팽이라 불리는 그리그. 북유럽의 어두운 면과 서정적인 멜로디를 고전적 구성으로 작곡합니다.
에델펠트의 미술과 예술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러시아의 부당한 핀란드 지배, 마지막에는 음악 이야기를 하면서 두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마치 오래전부터 알았던 친구처럼 친해집니다. 에델펠트는 즉흥적으로 그자리에서 하이코 해안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시벨리우스를 초대합니다.
며칠 후 시벨리우스는 (하이코 해안에 있는) 에델펠트 집으로 찾아갑니다. 에델펠트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에델펠트가 비밀리에 교재 중인) 엘란 드 라 샤펠Ellan de la Chapelle를 소개합니다. 그녀는 클래식을 좋아하고 피아노 치는 것을 즐긴다는 말과 함께. 날은 금세 어두워졌고 셋은 저녁을 먹었습니다. 시벨리우스는 시종 노르웨이 작곡가 그리그의 (음악과 민족의식의) 위대함, 핀란드의 간절한 독립 열망, 에델펠트의 예술에 대한 칭찬과 존경을 표합니다.
식사가 끝나자 에델펠트는 평소 샤펠이 사용하는 피아노를 가리키며, 자네의 음악을 보여줄 수 있게나?라고 묻자 시벨리우스는 주저 없이 피아노 앞에 앉아 그의 자작곡을 치기 시작합니다. 시벨리우스 - <슬픈 왈츠>(하기 음악)
에델펠트는 시벨리우스의 짧은 연주가 끝날 무렵 무심코 샤펠의 얼굴을 봤습니다. 그녀는 황홀해했습니다. 마치 몽환(꿈과 환상) 속을 걷는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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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델펠트는 시벨리우스에게 좋은 연주를 들려줘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다음에 다시 방문해 달라고 말합니다. 시벨리우스는 하룻밤 묵을 생각이었지만, 에델펠트의 분위기가 반전된 것을 감지해 맛있는 식사와 즐거운 대화를 함께 해준 것에 감사를 표하고 집으로 향합니다.
에델펠트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시벨리우스의 뒷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샤펠은 부동자세로 어둠 속으로 사라진 시벨리우스의 뒷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2. 에델펠트는 샤펠에게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핑계를 대고 혼자 피아노가 있는 응접실로 돌아왔습니다. 아직 사람의 온기가 가시지 않은 이곳. 눈을 감고 천천히 시벨리우스가 피아노를 치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시벨리우스의 눈은 흑백 건반을 보는 듯 마는 듯 초점이 없어 보였고, 10개의 손가락은 마치 10명의 연주자가 각자의 연주를 하는 것처럼 움직입니다. 시벨리우스의 얼굴, 몸짓, 손가락을 쫓는 동안 피아노 음은 응접실을 가득 채웁니다. 에델펠트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경험을 합니다. 지금 이 순가, 이 공간엔 무정형의 감각만 있을 뿐.
3. 에델펠트는 직감했습니다. 시벨리우스는 위대한 예술가가 될 것이란. 정신을 차리자 시벨리우스도 피아노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텅 빈 피아노. 갑자기 사방이 밝아지고 샤펠이 피아노 연주를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에델펠트가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봤습니다. 샤펠은 의식하지 못한 채 피아노를 치고 있습니다. 샤펠의 표정은 행복해 보였습니다.
4. 에델펠트는 작업실로 이동해 캔버스 앞에 앉아 스케치를 시작합니다. 피아노 연주를 하는 샤펠(시벨리우스) 옆에 앉아 있는 자신(에델펠트). 왼손은 샤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집착), 오른손은 악보를 잡아줍니다(사랑). 한쪽에는 일본풍 병풍(초현실적 풍경)이 보입니다. 슬픈(에델펠트의 질투) 왈츠(피아노 연주).
질투-사랑-예술. 붙잡고 싶은 신기루.
* 화가 - 알버트 에델펠트Albert Edelfelt (1854 ~ 1905, 핀란드)
+ 전기(1854-1873)
알버트 에델펠트는 1854년 핀란드의 포르보에서 태어납니다. 에델펠트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1869년 헬싱키 핀란드 미술 협회 드로잉 학교에서 정식 미술 공부를 시작합니다. 1871년부터 1873년까지 아돌프 폰 베커Adolf von Becker의 문하생으로 수학을 합니다.
에델펠트는 1874년 벨기에 앤트워프의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역사화를 배웠고, 정부 장학금도 받습니다. 미술대회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이라는 작품으로 우수상을 받으며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 에델펠트는 벨기에 화가 에밀 클라우스Émile Claus와 오랜 우정을 쌓습니다.
+ 중기(1874-1889)
1874년, 에델펠트는 당시 유럽 미술의 중심지였던 파리로 이주합니다. 파리에서 그는 장-레옹 제롬의 문하생이 되어 프랑스 아카데미즘을 깊이 있게 공부합니다. 에델펠트의 화풍은 세련되고 성숙해졌으며, 특히 초상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1877년 파리 살롱에서 <여왕 블랑카>로 데뷔한 에델펠트는 파리에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어린이의 장례식>(1879)은 핀란드 시골 생활의 진솔한 모습을 담아 자연주의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파리에서의 성공은 그에게 많은 초상화 의뢰를 가져다주었고, <루이 파스퇴르의 초상화>(1885)와 같은 걸작을 완성합니다. 에델펠트는 프랑스와 핀란드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했고, 이는 독특한 북유럽 감성과 프랑스적 세련미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계기가 됩니다.
+ 후기(1890-1905)
1890년대부터 에델펠트는 깊이 있는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갑니다. 핀란드의 자연과 일상적 삶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을 많이 제작하였고, 핀란드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러시아의 지배 아래 있었던 핀란드인의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핀란드관의 장식을 맡으며 국제적으로도 큰 명성을 얻었고, 핀란드 미술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1905년 (51세) 사망합니다.
+ 비평적 관점
일부 비평가들은 에델펠트가 너무 보수적인 아카데미즘에 매몰되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인상주의가 파리 화단을 뒤흔들던 시기 에델펠트는 비교적 전통적인 화풍을 고수했다는 점에서 예술적 혁신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초상화 작업에 치중했던 그의 후기 작품 경향은 예술성보다 상업적 성공에 집중했다고 비판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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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특징
1. 자연주의
에델펠트의 초기작은 자연주의적 접근이 특징입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었고, 특히 핀란드 풍경과 일상적 장면을 세밀하게 작업합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진솔하게 표현합니다. 이러한 자연주의 요소는 에델펠트가 핀란드 문화와 풍경을 세계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2. 사실주의
에델펠트는 사실주의 화가로서 인물과 사건을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인물의 감정과 심리를 깊이 있게 표현했고,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 작업합니다. 특히 그의 초상화는 인물의 특징과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둡니다. 이러한 사실주의적 접근은 에델펠트의 초상화 속 인물들이 단순한 모델이 아니라,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존재로 느껴지게 합니다.
3. 인상주의적 요소
에델펠트의 후기작에는 인상주의적 요소가 두드러집니다. 에델펠트는 자연광과 색채 변화의 포착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야외 작업을 통해 실험을 합니다. 에델펠트의 작품은 종종 밝고 생동감 있는 색채를 사용해 순간의 느낌을 전합니다. 이러한 인상주의적 접근은 에델펠트의 작품에 더 많은 감정적 깊이와 생동감을 부여해 관객이 작품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합니다.
+ 의식 안의 미술관
에델펠트는 여름을 핀란드에서 탐험하고 그림을 그리며 보냈습니다. 그의 프랑스 그림은 거의 모두 파리 풍경이었지만 핀란드에서 그린 그림은 핀란드 시골의 풍경, 사람, 그리고 특별한 빛을 포착했습니다. _Wikipedia
에델펠트의 작업은 크게 두 가지 스타일입니다.
초상화, 핀란드 시골 풍경.
초상화에서는 프랑스적 세련미와 사실주의
핀란드 시골 풍경에서는 북유럽 특유의 감성이 느껴집니다.
하기 그림 <자작나무 아래>(하기 그림)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산이라는 오브제. 1881년, (일본 혹은 중국 스타일 같습니다.)
유럽의 가장 북쪽. 북극과 가까운 나라,
자작나무 숲은 상상되지만,
홀로. 흰 모자와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
장갑과 책. 신비롭습니다.
"이 곡은 천주교 기도문을 가사로 하는
여러 아름다운 아베마리아 노래 중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다." _1일 1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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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마리아. 성모 마리아. 예수님의 어머니, 어머니, 은총과 사랑이 가득한, 한편으로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 '지구'를 생각한다. _하루키
슈베르트의 이 Ave Maria는 성모 마리아 찬미의 기도문이 아닌, 영국 시인 월터 스콧의 서사시의 독일어 번역본에 기반한 가곡입니다.
오스트리아 번역가 Adam Storck가 번역한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였으며, 원래 제목은 “Ellen’s Third Song”이었습니다.
곡의 첫 구절이 “Ave Maria”로 시작되기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는 성모 찬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라틴어 가사로도 많이 불리며 종교적인 의미를 얻게 됩니다. _나무위키
삶이 고양될지 혹은 무해할지, 의식 안의 미술관을 꿈꾸며 ... 감사합니다. 하루키
+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