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손자와 함께 하는 설 풍경
처음 마루가 우리 집에 임시로 머물고 있었을 때, 차마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못했다. 좋아하지 않으실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며칠만 있으면 다시 제 집으로 돌아갈 녀석이니 굳이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박 삼일 일정이 일주일로 길어지고, 결국 마루와 함께 살기를 고민하고 있을 때,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엄마, 우리 집에 강아지가 와 있어.”
“무슨 강아지?”
“응, 시누이네 강아지였는데 (자초지종 설명) 이제 우리가 키울까 봐.”
“함부래이! 정 주지 마라. 나중에 죽고 나서 힘들어하는 사람 너무 많이 봤다.”
“……”
’이미 정들었는데…‘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어차피 부모님은 멀리 경남에 계시고, 우리는 경기 북단에 살지 않는가. 주로 명절 때나 일이 있으면 우리가 내려가지 부모님이 올라오시는 일은 없었다. 즉, 우리가 키우든 말든 부모님의 삶에 영향을 미칠 일은 없다는 얘기. 나는 이미 사십이 넘은 성인이 아닌가! 우리가 키우고 싶으면 키우는 거지.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던 모범생 K-장녀 딸은 이번엔 당신들 뜻과 상관없이 마루와 함께 살기로 했다.
얼마 뒤 부모님과 통화를 하면서 넌지시 마루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강아지 키우는 집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이야기(애 안 생긴다, 털 날린다, 부부관계때도 강아지가 쳐다보고 있어서 못 한다더라 등등)를 늘어놓으셨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냥 마루가 너무 이쁘고, 착하며, 사춘기 아이들의 정서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덧붙이고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 나는 부러 마루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엄마도 화제에 올리지 않으셨다.
설이 다가오기 몇 주전 어느 날,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엄마는 이번 설에는 처음으로 역귀성을 하고 싶다는 속내를 비치셨다. 다른 누구 권사네는 명절 때마다 서울 올라간다고. 한 달 반 전에 부모님 댁에 다녀왔고 이번엔 안 내려가기로 미리 얘기가 되어있던 참이었지만, 동생네도 이번엔 못 간다고 하니 조용히 명절을 보내실 두 분이 마음 쓰이던 차였다. 그럼 올라오시라고, 차표를 알아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기차표는 이미 매진이었지만 버스 좌석은 남아있었고, 동생이 흔쾌히 예매를 해주었다. (땡큐, 시스터!)
몇 년 만에 우리 집에 오시는 부모님을 맞이할 준비에 돌입했다. 깔끔한 성격의 엄마를 위해 이불을 세탁하고, 구석구석 대청소를 하고, 막내 침대를 빼서 우리 방으로 옮기고, 부모님이 계실 방을 만들었다. 부모님이 오시는 건 좋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에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마루… 어떡하지? 얘랑 부모님이랑 잘 지낼 수 있을까? 마루가 온 뒤 손님은 여러 번 치렀지만 자고 가시는 분들은 처음이라 어떻게 반응할지 염려가 되었다.
드디어 당일, 지하철역으로 부모님을 모시러 갔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우리 집에 강아지 있대이. 놀라지 마셔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부모님은 그저 빙그레 웃으실 뿐이었다. 집 문을 열자 마루가 예상대로 왈왈왈! 크게 짖었다. 그런데 그 짖음이 적대적이기보다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흥분에 가까웠다. 적대적일 때는 머리와 앞다리는 낮추고 엉덩이와 꼬리를 치켜들며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는데, 엄마 아빠를 보고는 뛰어오르며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시작이 좋았다.
시간이 지나자 서로 적응이 되었는지 마루는 아빠가 앉아계신 소파 옆에 옆구리를 붙이고 엎드려있기도 하고, 엄마 다리를 붙들며 안아달라고 애교를 피우기도 했다. 워낙 사람을 좋아하고 붙임성이 좋은 강아지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라니! 더 놀라운 건 부모님의 반응이었다. 계속 쓰다듬고, 예뻐라 해주시고, 깨끗하게 세탁해 놓은 침구 위에 마루가 올라가도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아니, 집에 들어오자마자 캐리어 바퀴부터 싹 닦아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엄마 맞아?!!!!
친정 부모님이 머무르시는 2박 3일 동안 마루는 사춘기에 들어간 두 아들들 대신 막내 개손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다 같이 강아지와 아침 산책도 다녀오고, 서로 꼭 붙어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특히 윷놀이하는데 자기도 끼겠다고 자꾸 윷판에 들어오는 마루의 모습은 엄마아빠를 웃게 만들었다. 첫날 새벽엔 화장실 갔다 방으로 들어가시는 아빠를 보고 짖었지만, 둘째 날 새벽엔 조용하더라며 아빠는 ”야가 참 영리해! 다 안다니깐! “ 하고 은근한 애정을 표하셨다. 엄마는 새벽에 소파에서 마루랑 잠깐 놀아주다가 마루 꿈(이른바 리얼 개꿈)을 꾸시기도 하셨다고. 잉? 나도 아직 못 꾼 마루 꿈을?
설연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신 부모님께 메시지가 왔다.
“강마루 보고 싶어.”
아니, 두 손자는 어쩌고 개손자가 먼저 보고 싶으시다니. 최애 팟캐스트 ‘여둘톡’의 김하나 작가님은 가끔 '강아지/고양이 키우지 말라던 부모님' 이란 제목으로 검색해서 동영상을 보는 게 취미라고 하시던데, 우리 부모님도 그중 하나가 되신 걸까? 크크.
나는 “함부래이 강아지 키우지도 말고, 정 주지 말라던 분 어디 가셨나~~? ㅋㅋㅋㅋㅋ” 하고 받아쳤다. "ㅋㅋ 그러게, 마루는 얌전해." 하시는 엄마. 하핫, 울 부모님도 우리 마루의 진중하고도 귀여운 반전 매력에 빠지신 게 틀림없다. 강아지 키우지 말라는 엄마 말 안 듣기 잘했지. 이번 역귀성 성공적. 엄마, 아빠 다음 추석엔 개손자 보러 또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