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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지 않는 눈, 쌓인 세월에 대하여

Life in Canada

by 림스

날씨는 산행의 색깔을 정한다. 등산화를 신고 나온 아침의 햇살은 부드럽고 서늘했다. 오후에 36도까지 올라간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산 날씨는 상수가 아닌 변수라서 가봐야 알 수 있었다. 주차장에서 모두 모였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고, 처음 뵌 분들도 계셨다.


구름이 많이 낀 하늘이었다. 햇빛이 강하지 않아서 산행하기에 적절한 날씨였다. 하지만 문제는 산이었다. 그 전 올랐던 산들은 그래도 평지와 오르막이 적절히 섞여있는 산들이었다. 하지만 Wedgemount Lake는 말 그대로 오른다라는 표현이 맞는 구간들이 많았다. 시종일관 오르막이었고, 때때로 ‘기어’ 오른다라는 표현이 어울릴만한 구간들도 있었다. 산길 참 더럽다.라고 말하신 분도 계셨다.


산행 시작 전 회장님께서는 마지막 구간이 경사가 심하다고 말씀하셨다. 경사도 심한데 산길에 돌들이 많아 위험하다고 하셨다. 자잘한 돌들을 밟다가 밑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생기면 특히 위험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괜찮을 수 있지만, 밑에 서 오르는 분들에게는 크게 다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산행을 오르면서 쉬는 시간마다 이야기를 하셨다. 내가 들은 것만 3번이다.


KakaoTalk_20210801_153129303_12.jpg 산행 중간에 보이는 폭포

그렇게 강조하는 것이 위험해서이겠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회장님께서는 “돌 굴러 가유” 하고 말하면 이미 늦어버린 충청도 분이셨다. 말이 끝나고 나면 밑에 사람은 이미 숨진 채 발견되어 뉴스 보도가 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쉬는 시간마다 미리 말씀하셨던 것 같다. ㅋㅋㅋㅋ(농담 농담)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오르막이 끝나자 약간의 평지가 나왔다. 역시 모든 일엔 끝이 있다. 그리고 위에 말씀하셨던 오르막 돌길이 우릴 반겼다. 역시나 경사가 심했다. 길이 아닌 곳이 굳이 가면 또 길이 됐다. 캐나다 산 특징인가 보다. 폴대가 없는 나는 안전해 보이는 돌들을 손으로 잡아가며 산을 올랐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사족보행이 시작됐다. 문명인에서 최초의 인류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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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돌길을 올라가야 아름다운 호수를 볼 수 있다.


산이 테스트를 하는 기분이었다. 너넨 올라와서 아름다운 Lake를 보려면 예를 갖춰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폴대가 있든 없든 시종일관 낮은 자세로 산행을 올라야 한다. 없는 사람은 거의 기어오르는 산길이었다. 이렇게 낮은 자세로 위로 올라가면 산은 “그래. 자넨 통과했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위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호수는 올라오면서 쌓인 피로감을 씻겨주었다.


그 돌길 오르막을 통과하고 나면 걷기 쉬운 평지와 아름다운 호수가 나온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즐기라고 신이 주신 공원 같았다. 정상에 오니 사람들이 꽤 많았다. 다들 고통스러운 표정은 온 데 간데없고, 사진을 찍으며 즐기는 표정들을 지었다. 그리고 우린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보며 식사를 시작했다.


KakaoTalk_20210801_153129303_29.jpg 펼쳐진 호수

식사를 마치고 더 깊숙이 들어갔다. 그러니 또 다른 호수가 나왔다. 그곳엔 녹고 있는 빙하들이 호수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이번 이상기후로 인해 폭염 때문이라고 하셨다. 회장님께서도 몇 번 Wedgemount Lake 오르셨는데, 빙하 때문에 안쪽까지 가지 못했고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셨다. 난 운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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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폭염으로 녹아버린 빙하


암석에 나는 주저앉았다. 떠 있는 빙하들을 안고 있는 호수에 손을 담가봤다. 차가워 세포들이 놀란 느낌이었다. 세수를 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앞을 봤더니 엄청난 폭염을 이겨내고 남아있는 눈들이 산에 붙어있었다. 함부로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퇴적을 내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여유롭고, 꿈처럼 느껴졌다. 이 순간에 집중했다. 수많은 시간 동안 깎고 깎이며 만든 장관들. 남아있는 눈들은 더 이상 눈이 아니라 세월이었다.


무언가 얻으려고 정상에 가는 것이 아니라 정상으로 가는 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과정에서 숨이 목까지 차올라 행복을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그것을 깨닫기에 필요한 것은 언제나 ‘먼 훗날’ 일 것이다.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여름의 하루를 선물하며 지루한 영원보다는 새하얗게 빛나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고, 빨리빨리에 익숙한 나에게 느긋함의 품위를 알려준 <Wedgemount Lake>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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