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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카눈넝 Oct 23. 2022

<1장>_1. 땅을 보고 걷는 아이

“나는 커다란 숲을 보지 못해. 하지만 나무껍질 위에 기어가는 개미의 표정을 볼 수 있어.”     


어린 시절 귀에 박히도록 들어 지금까지도 머릿속을 맴도는 부모님의 잔소리가 있을까? 자주 듣던 잔소리는 그 사람이 어떤 아이였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내가 듣던 말은 “땅을 보고 걷지 말고 앞을 보고 걸어야지!” 였다. 엄마의 잔소리를 듣고 앞을 보며 걸었다. 이제는 다 고쳐진 습관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전 땅을 보며 걷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도 여전히 땅을 보고 걷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나는 왜 땅을 보고 걷는가.   

  

앞을 보고 걷자니 분주하게 굴러가는 자동차와 불빛들이 눈에 부셨다. 지나가는 사람을 나도 모르게 관찰한다. 금방 지나간 사람의 젖은 머리카락을 보며 어떤 아침을 보냈을까 상상한다. 이미 머릿속에는 생각들로 뒤엉켜 있는데 또 다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려 걸어본다. 저기 저 껌은 아주 오래전부터 붙어있는 껌인지 금방 뱉은 껌인지 골라낸다. ‘납작하게 눌린 벌레 위로 자전거가 지나갔나?’ 그 옆에는 벌레의 사체를 줄지어 옮기는 부지런한 개미들이 손을 들어 인사한다. 말라버린 지렁이가 많다. 아 어제 비가 왔었지, 하고 생각한다. 내리는 비에 몸을 적시려고 나왔다 미처 집에 돌아가지 못한 지렁이들. 그 순간 내 머릿속은 지렁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편리성을 위해 아스팔트를 깔아버린 인간의 이기적인 잔인함까지 떠올린다.

엄마는 바닥을 보며 걷는 어린 딸이 내심 걱정이 되셨을 것이다. 당당하게 앞을 바라보며 살아갔으면 좋겠는데 축 처진 어깨로 고개를 푹 숙이며 걷는 내 모습이 답답하셨겠지.     


땅을 보고 걷는 아이는 자라나 ‘생각이 더 많아진 어른’이 되었다. 외부 자극에 남들보다 쉽게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렇다, 나는 흔히 말하는 ‘예민한 사람이다.’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시절에는 하루를 사는 것이 벅찼다. 모든 일이 나의 예상 안에서 흘러가야 마음이 편했다. 항상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스스로 엄격해 작은 실수라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항상 폭우 속에 살고 있었다. 폭우를 피해 달아나고 싶어도 어디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몰랐다. 굵다란 빗줄기를 그대로 맞고 있자니 술이라도 마셔서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사람들을 웃겨가며 상황을 가볍고 즐겁게 넘기려고 했다.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을 것이라는 크나큰 착각을 하고 살아왔다.     

요즘 20·30세대에게 예상치 못한 인기를 얻는 티브이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 바로 오은영 박사가 출연하는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프로그램이다. 육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모들이 나와 문제점을 찾고 해결하는 육아 코칭 프로그램이다. 육아 코칭 프로그램에 전혀 관심이 없을 것 같은 20·30대가 방송을 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한다고 한다. 나 또한 그 방송을 즐겨 보는데 육아에 대한 어려움을 덜고자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러 사례의 아이들을 보며 어릴 적 내가 저런 아이였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동시에 내가 느끼는 감정들의 원인을 알게 돼서 나를 이해하기도 한다.

오은영 박사의 말을 따르면 예민한 기질의 아이는 외부의 자극에 쉽게 피로를 느끼며 남들보다 예민한 감각으로 더욱 많은 것들을 흡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예상 밖의 일에는 더욱이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데, 자신만의 틀을 만들어 놓고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상황이 생기면 난폭해지며 감당하기 힘들어한다고 한다.


‘어머나 딱 나다!’ 어릴 적의 나, 아니 지금의 나도 그렇다. 세월이 흘러 무뎌지고 사람들과 살아가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 적응을 해나가고 있을 뿐이지. 엄마가 된 지금도 나만의 루틴과 틀을 만들어 아이들을 그 안에 꾸역꾸역 넣으려고 한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예상 밖의 행동들이 나를 무척 괴롭게 했다. 이유도 모르는 울음에 생각지도 못한 말썽까지 결코 나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좀 더 일찍이 깨달을 수는 없었을까? 특히 육아하며 이런 나의 강박적인 행동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다. 가장 멋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자식’일지도 모른다다. 아이를 키우며 나에게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선명하게 나타나고 그 문제점을 아이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사실은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양치질을 하루 건너뛴다고 하여도 이가 당장 썩지 않는다. 바닥에는 머리카락이 서로 뒤엉켜 있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거실 한쪽 켜켜이 개어놓은 빨래가 며칠 그 자리에 머문다고 해도 거실에 큰 구멍이 뚫리지 않는다. 어쩌다 한 끼는 간식으로 때운다고 해도 갑자기 아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으며, 벽에 걸린 액자가 웬일인지 삐뚤어져 있어도 벽이 무너지지 않는다. 알면서도 버릴 수 없는 생각들. 놓아주는 연습이 필요하다. 육아를 시작했던 6년 전보다는 많이 내려놓았지만 아직도 모든 문제를 ‘그러려니’ 하지 못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스스로 ‘괜찮아, 지금도 충분해 잘하고 있어.’라고 말해주는 중이다.     


오늘 고단한 하루를 마친 당신도 세수를 마치고 거울 속 얼굴을 들여다보자. 그리고 조용히 소리 내 말해보자.     

“오늘도 고생 많았어. 괜찮아, 이만하면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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