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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Aug 01. 2018

내가 공황 장애라고요?

나는 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비틀즈가 노래하던 All you need is Love, 이런 노래를 접하기도 전인 아주 어린 시절에 나는 어른이 되면 세상이 크게 달라질 줄 알았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스케치북에 그렸고, 아주 근사한 드레스를 입은 나를 상상하며, 지구의 모든 사람이 배고프지 않을 거라 믿었다. 가슴 뛰는 설렘 속에 머리가 팔 하나만큼 더 커진 20대가 됐을 때, 그때까지도 나는 세상이 비틀즈의 노래처럼 사랑 하나면 모든 게 기적처럼 변모할 거란 꿈을 꿨다. 당장의 어려움과 힘듦이 닥쳐도 내일은 더 나을 거란 끊임없는 희망이 샘솟던 때였다.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란 시구절을 떠올린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나이가 들수록 외로움에 휘둘리고 돈벌이란 차가운 현실에 결빙하여 신념과 건강을 잃어갔다. 조막만한 나의 존재가 부서져도 그 밖의 커다란 세상은 더 나아지리라 생각했으나 뉴스 속에는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들이 잦게 일어났다. 삼풍백화점 사고를 보고 충격을 받아 일기를 쓰며 울었던 초등학생은 세월호 사건을 보고 울며 광화문으로 향하는 어른이 됐다. 그렇게 세상은 All you need is Love만으론 이겨내기 버거웠고 비틀즈는 거짓말쟁이가 됐다. 




고요한 사무실에 홀로 울려 퍼지는 키보드 소리 사이로 누군가가 몰래 스며들어와 나의 코와 입을 틀어막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맞이한 이 기이한 압박감은 나의 몸뚱이가 냉동육이 되어 랩으로 꽁꽁 둘러 싸매지는 듯한 기분 나쁨을 동반했다. 미련스럽게도 나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야근을 했고, 늦은 밤까지 갑갑함을 떨쳐내지 못한 채 기이한 압박감과 함께 귀가했다. 결국 그날 밤은 잠을 쉬이 이룰 수 없었고, 겨우 잠이 들었더니 이번엔 누군가가 가슴을 누르 듯한 위협적인 공포에 놀라 잠을 깼다. 메마른 30살의 어느 날, 나는 그렇게 공황장애와 조우했다.


처음엔 심장이나 폐에 문제가 생긴 줄 알았다. 나는 다음날 급히 순환기내과를 찾아 심전도 검사, 폐활량 검사, 그리고 각종 X레이를 찍어 보았다. 하얀 나의 뼛조각 사이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나의 심장과 폐는 우려와 달리 매우 건강했다. 순환기내과 선생님은 아무래도 신경성, 심리적 요인이 큰 것 같다며 신경정신과를 방문하길 추천했다. 그렇게 나는 생에 첫 신경정신과 상담을 했고 공황장애 초기증세란 판정을 받았다. 병명이 만들어내는 불안감과 공포는 실제로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 그 이상의 공포를 조장했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나의 불안을 다행스러움으로 점령했다. 

"너무 열심히 살았어요. 마음이 너무 쉬고 싶은가 봐요." 


낭만이 유배된 삶을 살아온 게 아닐까, 낭만으로 가득 찬 백일몽에 상기된 두 뺨과, 하늘 위로 끝없이 치솟던 입꼬리가 소멸된 삶을 살고 있는 나.  그 순간 나는, 당연히 손에 쥐고 날 때부터 적절히 배정된 쉬는 시간을 두고 스스로 수험생 마냥 쫓기는 시간표를 따라 살았음을 깨달았다. 반짝이는 낭만이란 단어와 그걸 내뱉는 언어가 사라진 시간 속에 '쉼'이란 다른 행성의 언어인 양 평생 들어본 적이 없는 말처럼 살았다. 

"그러게요, 저에게 쉰다는 게 뭐였을까요. 왜 잊고 살았을까요." 


지금 생각하면 다행스럽고도 놀라울 만큼 나는 이 병에 빠르게 대처했고, 공황장애 진단을 받은 지 3개월 만에 증상이 거의 사라졌다. 진단을 받은 직후 나는 바로 요가학원을 등록했다. 쌓여있던 일을 내일로 조금씩 미루고, 세트메뉴처럼 딸려오는 상사의 잔소리를 조금씩 귀에서 차단하려 노력했다. 모든 걸 공백으로 만들 필요를 느껴 도망치듯 휴가를 내고 치앙마이를 다녀왔다. 그리고 매주 꾸준히 병원을 나가 상담을 받았다. 물론 그러한 노력 속에서도 가끔 큰 스트레스를 받으면 공황이 찾아왔으나 이제는 가슴의 떨림과 머릿속 불안감을 조금씩이나마  스스로 다스릴 수 있게 됐다. 물론 나는 운이 좋게도 중증 공황장애는 아니었고, 나의 힘듬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주고 편의를 봐주는 감사한 상사가 있었다. 또한 아주 초기에 빠르게 진압을 한 덕분에 이후에도 내가 달랠 수 있을 수준의 가벼운 공황만이 오는 것이라고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공황장애는 한번 발병하면 영원히 몸 안에 간헐적 오류를 안고 사는 거라 언제 어디서 다시 재발할지 몰라요. 한번 고장 난 기계는 언제든 오작동을 할 수 있듯, 큰 스트레스가 없더라도 갑자기 뇌가 오류를 범해 예상치 못하게 다시 공황장애가 찾아올 수 있어요. 그럴 땐 놀라지 말고 컴퓨터의 블루스크린이라 생각하고 잠시 모든 걸 내려놓고 스스로를 부팅하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금전 생산의 일원이 된 이후 여유와 낭만, '쉼'이 있는 삶은 저지르기 힘든 금기 같았다. 하지만 얼음을 녹여 한 바구니의 세수할 물을 만들듯 느릿느릿한 쉼에 익숙해질 무렵이면 내 본래의 삶을 찾을 거라고 나는 스스로를 가르친다. 예민하기 짝이 없는 나는 아직도 쉼 속에서 가냘프지만 뾰족하고 아리는 불안을 느낀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날카로운 불안이 마음에 생채기를 낼 때면, 나는 예전처럼 피를 흘리며 쓰러질 때까지 끙끙 참지 않으려 한다.  마음과 몸이 도움을 요청할 때 모른 체 지나가지 않고 휴가를 사용하며 쉼을 실천하려 한다. 물론 건강관리도 자기 관리이며 능력이라 타박하는 사람들의 말에 찔끔 눈물이 나고, 온전한 내면의 평화를 찾는다는 건 하늘에서 무지개를 발견하는 것만큼 어렵고 익숙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내 인생에 배당된 조금의 쉼을 꺼내 가져보려 한다. 관성처럼 불안으로 다가가는 마음을 끌어 어린 아기를 뉘이듯 침대 위에 놓는다. 얇은 이불을 나의 몸 위에 덮어주고 나른한 쉼과 부드러운 위안의 말을 건넨다. 

"나는 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잔병치레는 오래 살 수 있는 예방주사고 좋은 거야. 그것도 감당 못하면 나중에 큰 병이나 쭈글쭈글 늙어가는 모습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난 왜 이리 잔병이 많을까 하고 투덜거리는 나에게 핸드폰 속 너머의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죽을병이 아니에요, 몸을 쉬게 하고 마음을 편히 먹으면 사라지는... 좋은 병이라고 하긴 이상하지만 스스로를 돌보라는 시그널이라고 생각하세요." 

이 병이 두렵다고, 왜 이런 증상이 나에게 왔는지 슬프다고 말할 때면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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