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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Oct 30. 2022

그렇게 파도 하나를 넘는 것

‘그래, 이게 발리 파도지!’

발리에 와서 가장 즐겁게 파도를 탄 날이었다. 아침부터 적당한 크기의 깨끗한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그날 바다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내리 3일간 큰 파도가 예상되어 남은 일정의 수업이 취소되었고, 그 김에 우붓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기로 한 참이었다. 다들 아쉬운 마음이 컸는지 오후 서핑 강습 일정이 급히 잡혔다. 강사들도 급하게 배정되어 원래 나와 함께 타는 아디와 아구스는 참여하지 못한다고 했다. 어쩌면 마지막 서핑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후부터 파도가 커지기 시작해 쉽지 않을 거라는 경고를 흘려들은 것이 화근이었다.


막상 들어간 바다에서 파도는 생각보다 컸고, 라인업까지 가는 길이 험했다. 거친 바다, 익숙한 선생님의 부재, 큰 파도, 허덕허덕 도착한 라인업에서 처음 만난 강사가 잡아준 파도는 내게 너무 컸고, 파도 위에 서서 ‘너무 무섭다, 난 갈 수 없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세 번쯤 파도에 곤두박질치고 다섯 번쯤 통돌이를 당하고 난 뒤 방향을 돌려 해변으로 향했다. 짜증이 났다. 선셋 서핑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꾸따의 노을을 바다에 둥둥 떠서 바라보면 행복하겠다고 호기롭게 나갔는데, 노을도 짜증 나고 끝도 없이 부서지는 파도는 넌덜머리가 났다.


텔레토비 동산처럼 태양 안에 남편 얼굴이 한번, 아기 얼굴이 한번 떠올랐다. 내가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나. 어린 자식과 남편을 집에 두고, 나이 든 양가 부모님께 육아를 떠넘기고 여기에 와서 이런 몰골로 이러고 있나. 눈물이 나서 장갑을 벗어던졌다. 눈물 닦는 손에도 까끌한 모래가 잔뜩 묻어 있었다. 모자며 머리며 엉망이 되어가지고서 바다를 보는데, 추웠다. 망할. 속상함을 이기는 쌀쌀함, 서핑숍으로 돌아가든 바다에 들어가든 선택해야 한다.


이대로 서핑숍으로 돌아가긴 너무 싫었다. ‘다들 재밌게 타는데 나는 왜 못해. 그냥 가면 나는 서핑에 대해서는 한 줄도 쓰지 못할 거야. 쓸 자격도 없지. 두 번만 더 구르고 안 되면 그때는 미련 없이 가자.’

다시 보드를 일으켰다. 모래를 털고 장갑을 끼고 파도를 넘으며 평소 아이가 즐겨 부르는 핑크퐁 노래를 흥얼거렸다.

“못해도 괜찮아, 괜찮아. 한 번 더 해보는 거야, 라랄라. 괜찮아 괜찮아 라랄라.”

아이가 놀다가 뭔가 잘 안 된다고 울면 괜찮다고, 못해도 된다고, 다시 하면 된다고 이 노래를 신나게 불러놓고 정작 나는 파도 앞에서 울고 있다니, 분하다.


라인업에 도착하자 익숙한 얼굴들이 측은한 눈빛으로 응원을 보낸다. 무뚝뚝하다고 생각했던 한국인 선생님이 옆으로 오더니 별안간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무서우면 무조건 파도 면을 봐. 안 그러면 계속 넘어져. 오른쪽으로 가려면 보드 위에 서자마자 오른쪽을 보는 거야. 밑에 보지 말고. 알겠지?”

다시 내 몫의 파도가 왔을 때 온 힘을 다해 패들링을 하며 중얼거렸다.

‘보드 위에 서서 바로 파도 면을 본다. 패들링, 패들링, 업! 왼쪽으로!’

커다란 파도 위에 우뚝 서서 바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보드가 아닌 면을 봐야 해. 오오, 간다!’

처음으로 길게 파도를 탔고 마음속의 두려움과 짜증을 조금 내려 보냈다. 다시 라인업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혼자 이렇게 흥얼거렸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파도를 보자, 선생님 말씀을 잘 듣자, 라랄라.”


물론 그것이 그날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라이딩이었다. 이후에도 처참하게 통돌이를 당하며 물을 먹고 높은 파도에서 메다 꽂히기를 여러 차례. 이제 됐다는 마음으로 해변으로 나왔다. 털레털레 스펀지 보드를 끌고 걷는데 옆에서 더벅머리에 모래를 묻힌 친구가 해변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괜찮아?”

눈이 마주치자마자 건네는 다정한 인사에 왈칵 눈물이 났다. 호된 파도에는 분해서 찔끔 나던 눈물이 다정한 말 한마디에 콸콸 쏟아진다.

“무서웠지. 맞어, 무서워. 나도 그랬어. 무섭지, 진짜.”

눈물은 꽤 오랫동안 멈추지 않았지만 해변에 널브러져서 보는 일몰은 짜증나게 예뻤다.


퉁퉁 부은 눈으로 서핑숍에 들어서자 약속이나 한 듯 오늘은 꼭 맛있는 거 먹으라는 한결같은 말들이 날아온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와 햄버거를 시켰다. 패티에 치즈까지 추가해서. 숙소 수영장에 앉아 햄버거와 맥주 한 병을 들이켜며, 왜 맛있는 걸 먹으라고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뭐, 그래. 이렇게 두들겨 맞는 날도 있는 거지. 맛있는 거 먹고 또 괜찮아지는 것이 인생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들어보니 내 눈물 겨운 라이딩을 지켜보며 라인업에 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쳐줬다고 한다. 혼란한 바닷속에 혼자 있는 것 같아도 서로가 서로를 지켜보고 있다고, 자꾸 넘어지고 파도에 휩쓸리는 너를 보면서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응원했다고. 때마침 선생님으로부터 짤막한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는 모래도 먹고 그랬다우.” 인류애가 샘솟는 이상한 스포츠다, 정말.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새벽,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파도를 탔다. 해변에서 엉엉 울었던 그날과 비슷한 크기의 파도였는데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심지어 더 많이 구르고 물을 먹었지만 내내 웃으며 탔다. 앞으로 몇 번 더, 아니 몇십 번 더 해변에 앉아 울 일이 있겠지만 괜찮을 것도 같다. 작은 파도 하나를 넘은 기분이다. 사는 것도 그렇겠거니,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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