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이라는 말을 종종 화두에 올린다.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행복하기 위한 방법.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항상 담아두고 있는 이 말이 어느 날 큰 고민으로 부풀어오르는 때에는 종종 주변에 이런 질문을 던진다.
"요즘 사는 낙이 뭐야?"
그러니까
"요즘 널 행복하게 만드는 게 뭐야?"
이 질문에 단박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나의 행복이 된다. 그렇게 행복을 가까이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이 세상의 행복의 총량을 견인하고 있다.
그가 나에게 알려준 행복의 순간들은, 오롯이 나에게로 와 마주칠 때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아, 이 순간을 설명하던 때의 그의 행복한 표정이 어땠던가. 그 부드럽고 충만한 감정이 그대로 느껴져 나까지 부드럽게 만들어버린다.
예정에도 없던 병원 신세 이후, 남들보다 덜 가진 채 살아야 한다는 불합리함(이라는 당시의 착각), 원래 할 수 있던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찾아오는 상실감들은 내 행복을 희석하기에 충분했다.
행복은 '어디서 찾는지'의 문제일 뿐. 절대로 빼앗길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원래 몸을 움직이는 일을 즐기는 편이었다. 주기적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인가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 때로는 산에도 오르고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일에 몸을 던져야 막힌 속까지 풀리는 법이었는데 이제는 근육이 사라진 자리에 통증만 남고 왕년을 추억하는 노인 같은 신세라고 느낄 때마저 있다.
주변에서는 서른이 넘으면 슬슬 운동을 해야 하는 나이라며 그렇게 게으르면 안 된다고 타박하거나, 친절하게도 함께 운동을 다니자며 권해주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못 한다고 해봐야 '시도해보지도 않고 안된다고 말하는 건 안된다'는 말만 돌아온다(대체 왜 시도해보지 않았을거라고 생각하는거야?).
무리가 되는 선이 어디인지 신중하게 재면서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갑작스럽게 몸의 위험을 느끼고 만다.
때로는 그런 건 핑계일 뿐이라는 빈정거림도, 본인도 아프지만 다 노력으로 이겨내고 있다는 훈계도 듣지만 그럴 때마다 일일이 불행해지고 반박하려 해 봐야 내 손해다. 그런 말에 의욕을 얻어서 운동을 해보려고 큰 맘먹고 전문 강사를 찾아가서 긴 상담 끝에 등록한 적도 있지만, 강사진의 회의 끝에 도저히 나를 안전하게 가르칠 수 없겠다며 일방적으로 환불 받았다든지(굳이 사업장 안에서 응급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은 백분 이해한다), 컨디션을 잠시 살피지 못해 응급실로 직송된다든지 하는 일로 낙담했던 경험을 굳이 꺼내서 설명할 필요도 없고. 그런 설명으로 타인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니다.
다만 어떤 실패, 포기의 경험이 나를 흔들 수 없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되새길 뿐이다. 그리고 타인을 재단하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이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를 반면교사 삼아 이제는 타인은 판단하거나 연구할 대상이 아닌 그저 받아들일 뿐이라는 걸 배웠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그렇군요.’, 그뿐이다. 그렇게 행복도 불행도, 타인의 삶도 나의 삶도. 그저 각각의 방식대로 존재하게 된다. 타인의 잣대로만 재야 하는 것이 내 마음속에는 없다.
지난해부터는 퇴근 후에는 한 시간 정도 동네를 산책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운동이다. 그래서 산책이 전보다 더 행복하고 소중한 일이 되었다. 그 길에서 예쁜 구름이나 노을, 해가 짧은 계절엔 손톱달 같은 걸 만난다. 이제는 누가 길에 서서 하늘을 향해 전화기를 높이 들고 있으면 나도 같이 바라본다. 거기엔 어김없이 뭔가 아름다운 것이 있다. 모르는 사람이 그걸 사진으로 담고, 나는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면서 지나친다.
여기 손톱달이 뜰 때 이 지구 어딘가에서는 아침 해가 뜨고, 또 어디에서는 저녁노을이 진다. 매 순간마다 이 지구에서 누구 한 사람 정도는 하늘을 바라보며 반짝거리는 것을 찾아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느 시간에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은 의미 있다.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행복한 눈은 더 쉽게 행복을 찾아낸다. 그것이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로 위장하고 있다고 해도.
행복의 역치를 낮추고, 불행의 역치를 높이는 것. 그게 편안하게 살아가는 요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