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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Sep 01. 2024

상흔

첫째 아이는 일요일을 싫어한다. 늘 이른 아침 일어나는 아이는 일요일 새벽 6시부터 눈을 뜨자마자 다음날이 월요일이라며 눈을 찌푸리며 성질을 내기 시작한다. 학교를 가기 싫다고 언제나 난리가 나지만 일요일은 더 세차다. 손으로 첫째의 등을 쓸어내며 동시에 눈은 정음이를 쳐다본다. 아직 자고 있기를 바랐지만 그건 언제나 불가능하다. 첫째의 목소리가 사뭇 날카롭고 크기에. 정음이는 눈을 빠꼼 뜨고 천장을 응시한다. 여느 때처럼. 병원에서나 집에서나. 그를 향해 나는 말한다. 잘 잤냐는 말.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자는 말. 진심이 사실로 실현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나는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렇게 주말 하루가 시작된다. 가뿐 숨을 한번 들이켜 내쉰다. 그리곤 나도 내게 말을 건넨다. 오늘은 덜 울어보자고. 오늘은 부디 절망의 늪에 손쉽게 빠지지 말아 보자고. 그리고 오늘은 주말이니 좀 더 힘을 내야 한다고. 왜냐하면 주말은 부끄럽지만 이제 내게 사실 거의 지옥이나 다름없어서..



아침과 점심 그리고 저녁. 중간중간 두어 번의 간식 챙김. 사실 건강한 쌍둥이를 양육하면서도 식구들의 끼니 챙김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반찬투정이 부쩍 심해지고 서로 음식 선호경향이 다른 아이들의 비위를 맞추는 건 정말 어려웠다. 그런데 지금은 그 난이도가 최소 3배는 더 오른 느낌이다. 거의 먹지 못하게 되어 버린 정음.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먹고 싶은 게 생기면 그때그때 바로바로 공수해야 하는 일상이기에. 그뿐 아니다. 먹지 못해도 걱정이지만 먹고 있는 정음이를 볼 때도 사실 걱정은 가시지 않는다. 저러다 또 분수토를 하는 건 아닌지 노심초사하며 내내 관찰하고 지켜보며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것이다. 극도의 피로감과 절망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하는 나날이다...



긴장과 피로감의 원인은 결국 '눈치' 에서부터 시작될 테다. 어느새 나는 아이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여자이자 엄마가 되었다는 걸 나 자신만큼은 안다. 그러나 지금의 생활적 난이도가 급속도로 올라간 연유는 결국 악성뇌종양 판정을 받고 돌연 뇌암 환자가 된 정음이의 법적 보호자이자 간병인으로서의 눈치를 더 봐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음뿐 아니라 남은 형제인 첫째 아이의 눈치도 더 보게 되었다. 입원이 잦고 거의 매일 병원을 들락날락 거리는 탓에 부모와의 유대감이나 연결고리가 끊기기 십상인 아이를 생활적 피해자로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결국 되도록 아이들에게 그 무어 하나 '해'를 가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결국 여러 방면으로 '눈치'를 보면서 공중 그네 타듯 생활을 영위하는 중이다. 그리하여 그로 인한 피로도와 스트레스가 극도에 다다를 때가 잦게 되었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지만... 어떤 사람의 해는 뜨기까지 시간이 참 많이 걸리기도 하다. 




해소되지 못한 채 나날이 피로와 스트레스가 중첩되는 중, 주말이면 그 피로와 스트레스는 더 극대화되곤 한다. 남편이라는 존재가 집에 있는 날이면 한 사람분의 끼니가 더 늘어난다. 밥 숟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되지 그게 무슨 스트레스일까 싶겠지만 그렇게 수학처럼 딱 자를 수 없는 생활이라는 건 아마 나만 알 테다. 세 사람의 식단은 각각 다르다. 환자인 정음이의 분량과 먹을 수 있는 음식. 첫째 아이가 먹고 싶어 하는 것. 기타 어른의 식단... 



남편의 여름휴가는 나에게 사실 지옥이었다......'간병'과 '양육'을 '돕는다' 곤 했지만 돕는 게 돕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 후 주말은 여전히 나에게 쉬는 주말은 아니다. 도리어 노동강도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평일에 가까운 수준이랄까. 취학 아동이 학교에 가지 않은 시기. 어른 가족이 집에 하루종일 있을 때. 그리고 아픈 아이.... 



활기와 기력은 상실된 지 오래되었다. 표정에 웃음기가 보이던 때는 정음이가 아프기 전에서 멈췄다. '기쁨'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 시기는 이미 '과거'가 되었다.  어떤 것들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 어떤 것들은 되돌려놓을 수가 없다는 걸 안다. 알면서도 그 돌아오지 않은 순간을 그리워하는 어리석은 인간은 자주 목놓아 운다. 울고 울고 또 운다. 그러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지경에 이르자 가슴을 쾅쾅 내리 친다. 주먹 쥔 손으로 가슴을 툭툭 치면서 숨쉬기를 반복한다. 그제야 겨우 숨통이 좀 틔이는 가 싶은 여자는 그렇게 눈물을 멈추려 애쓴다. 바깥으로 거센 오열하는 소리가 새어나갈까 싶어 방문을 닫아 놓았고 한편 방 밖에서는 열심히 게임을 하느라 정신없는 두 아이의 존재와 어른 남자는 그들을 지켜보며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느라 정신없다는 사실이 사뭇 다행이지 싶다. 이 우습고 초라한 형국.... 그러나 이것이 현실. 사실 그대로의 생활의 단편. 생활은 인스타그램이 될 수 없다. 포장되지 않은 그대로의 생활을 가까이서 쳐다보면 언제나 희극보다 비극에 가까운 법이다...



갇힌. 


 어떤 시간과 공간에 갇힌 채 빠져나가기 쉽지 않아 보이는 게임이 시작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 상태로 게임체인저가 되기에는 턱없이 용기도 기력도 역부족이라는 걸 너무나도 극명히 자각하는 인간은 다만 자주 목놓아 울 뿐이다. 울고 나면 나아지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면서. 다만 울고 난 이후엔 나날이 밝은 에너지는 소실되어 감을 모순적으로 느끼며 자중해야 한다는 걸 목도하면서도 그러기 쉽지 않은 순간은 눈을 질끈 감고 어금니를 꽉 깨문다...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정음이가 제대로 걷고 네 사람이 '가족' 으로써의 연대와 유대와 기쁨을 서로 나누며 화목했던 그 시절로. 당신을 향한 신뢰는 확실히 깨졌고 우리 사이엔 벽이 생겼다. 나의 절망과 환멸과 좌절을 그저 바라보는 타인에 불과하게 되어 버린 사람과, 그들 사이의 남겨진 아이들이 존재한다.



정음이의 히크만을 소독해야 하는 일. 테가덤을 떼고 붙이고 메딕스를 떼고 붙이고. 포비돈 요오드 스틱으로 몇 번 중심정맥관 부분을 소독하는 순간. 하루에 한 번은 꼭 토사물을 치우고. 아이의 가글을 시키고. 첫째 아이의 등하교를 챙기는 시간. 기타 병원에서 날아오는 검진 날짜와 열체크 수첩을 확인하는 일...



돈을 벌어오는 남자와 그 돈으로 두 아이를 살피는 여자. 그들 사이의 두 아이. 크게 아파진 아이와 아프지 않지만 그로 인해 마음이 아파지기 시작할 것 같아서 노심초사 살피는 중인 또 다른 아이. 시절을 어떤 정신으로 살아내고 있는지 솔직히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떠서 '오늘'이라는 시점 기준으로 내가 있는 일들을 뿐이다. 밥을 짓고 식사를 챙기는 일. 아픈 아이를 관찰하고 통원을 반복하며 의식주를 챙기는 일. 기타 살림을 살피는 일... 수다쟁이 엄마는 사라졌다. 다만 말없이 조용히 일을 하는 눈이 자주 빨개지고 마는 엄마가 존재한다. 그것 조차 부끄럽고 못내 미안해서 말은 없어지는 중이다. 되도록 말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문장이 나오지 않는다. 식구들을 향해 나는 좀처럼 문장을 이을 수 없는 날들이 많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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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면 양성자 통원 끝이다..........그리고 몇 주 후엔 MRI 및 입원 항암이 예상된다. 외래는 여전히 끊김없다. 다음주 수치는 좀 좋았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번갈아가며 각자의 짜증과 히스테리를 부린다. 그들의 목소리를 견디고 이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어떤 생각들은 조각이 되어 흩날린다. 괜찮은 척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정음이의 상처가 천천히 아무는 속도만큼 이 인생의 상처는 언젠가 상흔으로 남겨질까. 잘 모르겠다. 다만 오늘 할 일을 해 나갈 뿐이다..... 죽지 못해 살아내는 사람의 마음을 통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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