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닭고기 수프. 그리고 아들 생각
아내에게서 연락이 오면, 좋은 소식일까, 나쁜 소식일까 걱정이 든다. 아들이 이러 이러해서 참 귀여웠다는 좋은 소식, 아들이 아프다는 소식, 아들이 많이 힘들어한다는 소식. 어느 쪽일까... 범이가 자라면서 유치원에 가게 되었고, 부쩍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많이 얘기한다고 들었다. 가슴이 많이 시리다. 그래서인지 요즘 육수를 젓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피클을 만들다가도, 닭작업을 하다가도, 하루에 한번 쉬는 1시간의 시간에도 아들 생각이 나서 혼자 멍해지는 시간이 많아졌다. 자꾸 눈앞이 뜨거워지지만 다행히도 각자 일에 바빠서 서로의 눈을 쳐다볼 일이 적으니 좋다.
( 벌써 재작년. 아들의 장난감 투구와 갑옷, 칼과 방패를 든 사진을 보내와서 얼른 그려서 보내주었다. )
내 어릴 적의 최초의 기억은 아마도 네 살이었나보다. 서울의 어느 옛동네, 지금은 다 개발되어 없어졌다지만 그때는 산이 있어서인지 높게 계단을 올라서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집이었고, 마당 한가운데 수돗가가 있었다. 펌프질로 물을 길어올리는 것이었는데.
아마 일출 시간이었나보다. 하늘이 황금빛으로 타오르고 있었고, 수돗가에 비잉 둘러선 아빠, 엄마, 누나, 나 이렇게 네 사람. 아침 세수를 하러 모였던지 러능셔츠 차림이던 모두의 얼굴에 물기가 있었다. 그리고, 앵무새 새장을 청소한답시고 밑으로 여는 뚜껑을 여시던 아버지의 실수로, 두 마리 초록색 새가 푸드덕 거리며 날아올랐고, 멀리 못가 이웃집 지붕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 생생한 총 천연색 기억 덕분인지, 내게는 매일 바빠서 새벽 2시에 들어오고 4시에 다시 출근하셨던 아버지와 놀았던 기억도 별로 없고, 주말에 함께 공놀이를 한 기억도 없지만, 그래도, 가족에 대한 개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다. 가족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눈부신 한 장면의 기억.
나는 가끔, 우리 아이에게, 범이에게 인생 최초의 기억은 무엇일까. 궁금해지고 또 두려워지고, 다시 슬퍼진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합쳐서 몇 차례 되지않는 아빠와의 만남, 합쳐서 몇십일도 되지않을 함께 지낸 시간들. 너무나도 미안한 내게,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몇 번 보지못한 아빠를 너무나도 따라주고, 좋아해준 아들. 항상 그립고 항상 미안하다.
안그래도 일년에 몇 번 안되도록 뜸하게 보던 사이에, 작년 코로나가 터진 1월 말 이후로 만나지 못하다보니, 영상통화와 사진으로 보던 아들이 어느새 부쩍 자라있다.
마지막으로 보던 날,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아빠와 함께 공항에 간다면서 신나하던 아들. 그 아들의 손을 잡고 편의점으로 이끌며 들어가던 아내는 내게 몰래 눈짓을 했고, 그 사이 나는 부리나케 장인, 장모님께 안타까운 얼굴로 인사를 드리고 입구로 들어섰다. 아니 사실은 시간이 지난 뒤에도 검색대쪽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몰래 뛰어나가서 편의점 진열대 사이로 보이는 아들과 아내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며 가슴이 무너졌었다.
자다가도 아빠를 찾고, 잠시 화장실에 가면 문앞에서도 아빠를 찾으며 우는 아들이었는데, 잘 있으라는, 다시 보자는 간단한 인사말 한마디도 전해주지 못하고 말없이 떠난 아빠를 얼마나 찾고 원망하며 울었을지.. 집에 돌아가서도 여기 저기 문을 열어보고 울며 아빠를 한참동안 찾다가 잠들었다는 아들의 얘기를 전하며, 아내도 코먹은 소리로 얘기했다.
국제 결혼, 기러기 가족. 코로나 상황에서는 가슴철렁한 얘기이다. 아니 그 이전에도 나는 무척이나 무능하고 책임감없는 남편이자, 아빠이긴 했다. 과연, 내게 아빠의 모습, 가족모두가 함께 있는 최초의 기억이 각인된 것처럼, 아들에게도 그 마음을 붙들어줄 좋은 기억이, 한 장의 사진같은 뚜렷한 기억이 있을까?
혹은 늘 영상통화로, 사진으로만 어렴풋이 남은, 아빠라 불리우는 한 남자의 모습과
늘 한 사람은 부재중인 가족의 기억으로 남아있을까. 두렵고 무섭고 슬프고 미안하다.
진짜 마법의 힘이 생긴다면... 좋겠다. 어디든지 마음먹은대로 오고 갈 수 있는 능력이 생겨서, 아들에게 매일 다녀올 수 있고, 어디든지 함께 놀러갈 수 있으면 좋겠다. 아픈 아들을 업고 병원에도 직접 가고, 열이 오른 아들의 이마에 찬 물수건을 올려주고, 유치원 숙제를 위해 아들과 함께 색종이를 오리고, 서투르지만 바둑도 함께 두고, 주말에 바깥 구경을 하며 목마도 태워주고, 잠이 들면 업고서 터벅 터벅 걸어도 보고싶다.
필요로 할 때, 언제든 있어줄 수 있는 아빠가 되고싶다.
아니면 꿈속에서라도 나타나 늘 대화하고, 함께 놀 수 있다면, 그래서 꿈에서 깨어서도 함께한 기억들이 잊히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 마법의 닭고기 수프를 만들어내어 한그릇 뚝딱! 먹고나면 소원을 들어줄 수 있고, 행복하게 될 수 있는, 그런 마법사였으면 좋겠다.
글을 쓰다가 뜨거워진 눈가에 눈물이 말라붙으며 마음이 조금씩 서늘하게 가라앉는다.
문득, 이런 바람이 정말로 이루어지도록 아들과 가족과 모두 빨리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함께 행복하게 지낼 수 있으려면,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어떤 마법을 준비해야 되지??
곰곰 생각을 해보니...
어쩌면 나는 진짜 마법을 부리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