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 구성작가를 꿈꾸며 방송아카데미를 다닌 적이 있었다. 당시 내가 거주하는 곳은 할아버지 댁이었고 도심과는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대학교 산하 아카데미에 참여해야 했다. 더욱이 정규 직원과 똑같은 근무 시간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양해를 구하고 퇴근 한 시간 전 일찍 나와 버스를 타야 했다. 그렇게까지 무리를 하며 방송아카데미를 다닌 것은 작가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고, 그나마 손을 뻗어 당장 이룰 수 있는 직업이 구성작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리인 줄 알면서도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구성작가로 활동 중이신 선생님은 기획과 취재, 큐시트 작성 등의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구성작가가 하는 일들을 배워가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특히 취재와 섭외 부분을 들으며, 내가 생각하는 작가와 구성작가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생각하는 작가는 우아하게 앉아서 글만 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성작가는 바쁘게 전화를 해서 섭외를 하고 공문을 보내며, 세세하게 출연진들도 챙겨야 했으며 진행자와 출연자들의 멘트까지 미리 예측하며 작성해야 했다. 또 현장 취재도 참여해야 했다.
하루 종일 일 하다가 저녁 늦게 수업을 들었던 터라 피곤하기도 했지만, 현실을 떠나 미래 작가를 꿈꾸는 시간은 꿀과 같았다. 그러나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대학교 산하 방송아카데미지만, 버스를 타려면 꽤 걸어 나와야 했고 지역 특성상 밤 9시 반이 넘으니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두려움이 많은 나였지만, 하고자 하는 일 앞에서는 '깡'을 발휘할 줄도 아는 나였기에 어둠을 뚫고 걷는 그 길에서 '내일은 작가'라는 마음으로 버텼다.
그때였다.
자가용 한 대가 섰고, 창문이 열렸다.
선생님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어둠 속을 걸어 나가는 내가 신경 쓰였는지 어디까지 가야 하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대답을 했고,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시더니 타라고 했다.
알고 보니 선생님은 내가 사는 지역의 아파트에 살고 계셨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을까 싶었다. 도심과 떨어진 지역에 구성작가 선생님이 살고 계시다니, 그것도 내가 사는 동네에 말이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나는 입을 쉬지 않았다.
어색한 공기가 흐르면 안 될 것 같아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들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차분하고 다소 내성적인 성격이셨는데, 애쓰는 나를 위해 더러 질문도 해주셨고 대답도 성의껏 해주셨다.
나는 자칫 나의 귀가가 신경 쓰일 선생님을 위해,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며 그 차를 일부러 타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러다 정말 힘에 부칠 때는, 선생님께서 '오늘도 약속 있니?' 물어보시면 없다고 솔직히 말하고 선생님께 신세를 졌다. 여자 선생님이었다면 덜 부담스러웠을 텐데, 남자 선생님이라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다행히도 선생님은 마흔 중반의 대머리 선생님이셨고, 나 또한 이십 대 초반의 철없는 사회초년생이었기에 대화 자체가 밀도 높지 않았다. 대부분 나의 질문이 많았고, 선생님은 조용조용 답을 해주며 집에 귀가했다.
그렇게 세 달의 교육과정이 지났다. 마지막 날, 선생님은 방송용 카메라를 가져오셨고 우리들의 모습을 찍으셨다. 그리고 인터뷰를 하셨다. 왜 구성작가가 되고 싶냐고 말이다. 그때 나의 대답은 이랬다.
"작가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 수 있을지 몰랐어요. 그런데 구성작가는 이렇게 아카데미 수업을 들으면 될 수 있는 기회가 좀 더 빨리 올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너무 현실적인 대답이지만 그래요."
부끄럽지만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그 마지막 수업 날도 선생님 차를 얻어 탔다. 선생님은 마지막 수업 날이고, 마지막으로 함께 귀가하는 날인데 뭐 궁금한 것 있으면 물어보라고 하셨다. 수강생에 대한 멋진 배려였다. 나는 그동안의 겉치레 질문이 아니라 정말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저 재능이 있나요? 작가가 될 수 있는 재능이요?"
선생님은 진지하게 대답해주셨다.
"너 재능 있어. 감각도 있고. 완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노력하면 좋은 작가가 될 거야."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를 하고, 다른 직원들 눈치 보며 한 시간 일찍 나와 버스를 타고 시내까지 나가 '방송아카데미' 수업을 듣는 열정을 발휘했던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상태지만, 작가가 될 수 있는 재능이 있다고 현직 구성작가님께서 인정해주셨으니 말이다.
너 재능 있다고.
너 감각도 있다고.
선생님과의 마지막 귀가 길,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오랫동안 내가 작가의 꿈을 향해 달릴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것은 나를 살려주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