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 모든 순간을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그런 엄마가 고마우면서도 그 깊은 사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당시, '마마보이 혹은 마마걸'이라는 단어가 생겨나기 시작했을 때라 더 그랬던 것 같다. 그게 아니더라도 엄마의 지나친 사랑과 관심으로부터 멀어질 필요는 있었다. 그 관심과 사랑은 나의 성장을 방해하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엄마는 눈부터 흘겼다.
"하지 마! 세상이 호락호락한 줄 아니? 그냥 얌전히 살아. 네가 그걸 할 수 있을 거 같아? 괜히 골머리 썩지 말고 하지 마."
미안하지만, 엄마는 나의 성장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분이셨다.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고 눈을 반짝이는 딸에게 하지 말라며 기를 죽여놓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 말이다. 한동안은 그런 엄마가 무척 원망스러웠다.
'엄마는 왜 그랬을까? 엄마는 왜 그렇게 겁이 많고 비관적인 사람일까?'
어릴 때, 잠결에 들었던 엄마와 외할머니의 대화들이 떠오른다. 정확한 기억인지 확신할 수 없으나, 엄마는 보통이 아닌 가정에서 성장했다. 내가 엄마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음에 엄마가 싫어할 수도 있어, 이 글을 쓰는 것이 망설여지지만...... 엄마는 나의 브런치를 볼 수 없을 테니 살짝 써볼까 한다.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나의 외할머니는 어떤 남자의 두 번째 아내로 시집을 갔다. 그 어떤 남자는 나의 외할아버지다. 외할아버지는 첫 번째 아내가 병으로 죽자, 외할머니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나의 엄마를 첫째 딸로 낳았다. 나의 엄마는 약하게 태어나 어릴 때부터 많이 아팠단다. 사람들은 오래 못 살 것이라는 말을 했지만, 엄마는 현재 70세다. 어쨌든, 약한 엄마를 집 안 사람들은 많이 아껴주었다. 지금도 엄마가 자랑스럽게 말하기로는, 밥 먹을 때 밥을 푸면 고등어 살을 밥숟가락에 얹어주는 기억이 많다고 한다. 그 어린 시절의 기억을 말할 때의 엄마는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울 것이 없는 유복한 집 자녀의 표정을 짓는다. 실제로 외할아버지는 미군 부대에 물자를 전달하는 중간 상인 역할을 했으므로, 돈벌이가 꽤 좋은 편이었단다. 엄마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정원이 멋지게 꾸며진 양옥집이 배경이라 참말인 듯하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외할아버지가 바람이 난 것이다. 1960년대, 나는 그 시절을 이해할 수 없으나 외할아버지는 바람이 난 여자를 집으로 데려와 살았다. 대박! 그러니까 나의 외할아버지는 일부다처제의 일부였던 것이다. 내가 그 당시의 상황을 본 적은 없지만 엄마와 이모, 외삼촌, 외할머니 입장에서는 충격의 도가니였을 것이 분명했다. 여기서 잠시, 나는 그 말도 안 되는 집안 상황에 놓인 어린 시절의 엄마로 돌아가 봤다. 그러니까 내 아빠가 우리 집에 바람난 여자를 데리고 사는, 그러니까 그 여우 같은 여자가 우리 가족들과 같이 밥을 먹고 같이 tv를 보며, 같은 화장실을 쓰는 것이다.
아무리 1960년대여도, 아무리 내가 경험한 일이 아니어도 화가 난다. 같은 여자로서, 같은 딸로서 말이다.
이후, 엄마는 스무 살이 되었고 잠시 직장생활을 하다가 중매로 만난 우리 아빠와 결혼을 했다. 여기서 또 기가 막힌 것은, 아빠를 소개해준 사람이 그 여우 같은 여자 그러니까 엄마의 아빠와 바람이 난 여자가 소개해준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빠와 아빠의 엄마, 그러니까 나의 친할머니가 그 여우 같은 여자와 어떤 인연으로 중매를 섰는지는 아직 고증하지 못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아빠한테 물어봐야겠다. 그리고 또 하나, 엄마는 왜 하필이면 그 여우 같은 여자가 소개해준 남자 그러니까 우리 아빠와 선 볼 생각을 했을까? 만약 나였다면 그 여우 같은 여자의 말이라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내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엄마는 빨리 그 집을 나오고 싶었고 그래서 빨리 결혼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뭐, 당연히 내 아빠가 마음에 들었으니 결혼을 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여기까지가 나의 기억이다. 그러니까 엄마는 상당히 이상한 형태의 집에서 성장을 했다. 아빠와 바람이 난 여자와도 같은 집에서 생활해야 했던, 정말 이상한 가정의 형태에서 말이다.
내가 굳이 엄마의 과거까지 소환한 것은, 엄마는 왜 그렇게 나에 대해 걱정이 많았고 비관적인 태도를 보였는 가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53년생인 엄마는, 분명 나와 다른 세대를 그리고 조금 불편한 가정의 형태에서 성장했다. 그러니 그 무엇인가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엄마의 딸로 성장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비관적인 말'들이었다. 호기심 많은 기질을 타고 난 나로서는 그런 엄마가 참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할 것이라고 말하는 나를 보는 엄마의 눈빛은 '해서 뭐하게?'가 쓰여 있었고, 차마 글로 담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비관적인 단어들이 쏟아졌다. 그런데도 그런 엄마를 온전히 미워할 수 없는 것은, 공격적이고 비관적인 엄마의 태도 뒤에는 연약한 어린아이가 있고 그 어린아이는, 자신의 딸을 안전하게 지키고 싶은 모성애가 가득했다.
엊그제,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남동생을 집으로 초대했다. 곧 엄마의 생일이기도 하고 추석도 다가오니 밥이라도 한 끼 하고자 함이었다. 엄마도 나도 두려움이 많은 편이라 코로나 이후 같이 밥 먹는 것을 극도로 피해 왔었다. 그러다 엄마와 통화하며 느꼈다. 엄마가 많이 포기하고 있고, 많이 우울한 상태임을. 그래서 같이 밥을 먹자고 전화했다. 엄마는 코로나가 무서운데 어쩐 일로 밥을 먹자고 그러냐고 했다.
"괜찮아! 어차피 우리 다 백신 2차까지 맞았으니까. 그리고 이러다가는 정말 평생 못 만나. 같이 입원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만나자. 엄마도 딸네 집에 오고 싶었잖아."
"그려~."
그렇게 엄마와 아빠, 남동생이 우리 집에 왔다. 우리는 비장한 자세로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코로나 이전처럼 같이 밥을 먹었다. 웃고 떠들며, 즐겁게!
못 본 새, 많이 늙은 나의 엄마는 딸네 집에 온다고 두 손 가득 무겁게 반찬을 만들어오셨다. 그리고 염색도 까맣게 했다. 이 모든 것을 해오느라 그 아픈 다리로 얼마나 힘들게 움직였을지 떠올리니, 가슴이 아팠다. 엄마는 가정을 이루고 사는 딸에게 더 이상은 비관적인 단어로 화를 낼 힘도 없어 보였다.
식사를 한 다음 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는 깻잎무침이 입에 맞느냐고 물었고, 비싼 장어를 집에서 처음 요리해봤는데 애들하고 사위가 잘 먹었는지 궁금해했다. 그리고 그랬다.
"우리 집안 딸들 중에서는 네가 최고로 잘났다. 신도시에 아파트도 갖고 있고, 애들도 이쁘게 잘 키우고 말이다. 네 아빠랑 우리 딸이 최고라고 얘기했어. 이대로만 잘 살아. 나는 네 걱정이 하나도 안 된다."
드라마를 그렇게도 좋아하는 엄마는 그 흔한 대사,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을 절대 해주지 못하지만 '네 걱정이 하나도 안 된다'는 말속에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표현하고 있었다.
엄마는 변해가고 있었다. 매운맛에서 순한 맛으로.
엄마는 늙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점점 맑아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