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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서점

나를 살려준 말 ( #육아 #서점 #남편 #결혼 #미혼 #책 )

by 글로리 Sep 2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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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에 퇴근한 남편이 오전 10시 반쯤 깨어, 더 이상 잠이 오지 않는다는 말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남편에게 두 아이를 부탁하고 나가면 마음 편히 외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휴일 날 아침, 홀로 외출을 하고 싶어지는 이유가 있었다.

 밖에 비가 오고 있었던 것이다. 사부작사부작 내리는 빗길을 홀로 우산 쓰고 걷는 일은 ‘치유’그 자체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비만 오면 우산 하나 들고 홀로 나가고 싶어졌다.  

   

 기분전환 좀 하고 오겠다는 나의 말에 잠시 놀라던 남편은 ‘그래, 네 마음 알아’하는 표정으로 어서 다녀오라고 말해주었다. 손 흔들어주는 남편과 철없이 게임에 몰두하는 두 아들을 두고 홀로 나가려니,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지만 흔치 않은 일이기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빗길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적당히 내리는 빗길 사이로 살짝 쌀쌀한 바람이 팔을 스쳤다. 그때였다.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참 당황스러운 눈물이었다. 복받치는 감정이 전혀 없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떨어진 것이다. 마스크 속으로 파고드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닦아내고, 누가 볼까 봐 얼른 주변을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살짝 쌀쌀한 바람만이 내 앞머리를 스칠 뿐이었다.

 이건 또 무슨 감정인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신나는 일을 앞둔 사람처럼 입 꼬리가 무한정 올라가고 나도 모르게 ‘하!’하고 웃었다. 그것은 웃겨서 나오는 웃음이 아니라 기쁜데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을 때 나오는 혼자만의 감탄사였다.   

      

“아, 행복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다. 진심으로 행복하면 이런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사선으로 내리는 비로 긴 청바지가 젖어들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나였다. 온전한 나.

 빗속에서 온전한 나, 그러니까 누구의 엄마도 아내도 아닌 온전한 나를 만난 것이다. 알 수 없는 눈물과 웃음은 생각지도 못한 ‘나’를 너무나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이었다.     

 나를 만났다는 사실에 갑자기 분주해졌다. 오랜만에 만난 나를 데리고 어디든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에게 물었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디를 가고 싶은지 빨리 말하라고. 아이들 점심을 차려주러 갈 12시가 오기 전에 마음껏 누리라고.   

 

 안타깝게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나가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한 손에는 우산을, 한 손에는 먹을거리를 들고 있었다. 여자의 눈빛이 나와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여자도 아이를 잠시 떼어 놓고, 홀로 자신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우리는 무언의 동질감을 느꼈다. 하마터면‘당신도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군요.’라고 말을 걸 뻔했다. 돌아보니, 여자는 화장품 가게 앞에서 무엇인가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여자를 향해 속으로 외쳤다. ‘당신을 위해 좋은 것으로 하나 사세요.’   

 

 시계를 보니 11시였다. 나는 조금 마음이 급해졌다. 아직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찾지 못했다. 12시가 되기 전에 얼른 나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서두르다 괜히 마트에 들어갈 것 같아,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12시가 넘어도 괜찮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이들은 안전한 집에 잘 있고, 아이들 아빠도 있는데 뭘 그리 애쓰느냐고. 괜찮다고. 좀 누리라고.    


 그러다 두 다리가 멈춰 선 곳은 서점이었다. 아이들 학습지나 사러 오던 서점이었다. 참새가 방앗간에 들리듯 문을 열고 들어섰다. 센스 있는 주인은 어떤 책을 찾느냐고 묻지 않았고, 나는 이 책 저 책 들춰보는 여유를 누렸다.     


 그때였다.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내 마음을 강렬하게 이끄는 책 한 권이 있었다. 책의 제목은 ‘개인주의자 선언’이었다. 어쩐지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화끈거렸다. 차마 그 책을 집어 들 수가 없었다. 그 누군가 나를 지켜보았다면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개인주의자가 되고 싶으냐고! 무슨 희생을 그리 많이 했다고 티를 내냐고’ 말이다.


 애써 그 책을 외면하고 다른 책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집어 들고 싶은 책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책을 좋아했던 나를 위해 책 한 권은 꼭 사주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내 눈은 계속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책으로 향했다. 자꾸 외면하는데, 자꾸 눈이 가니 참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 책을 집어 들어 결제를 했다. 내용 상관없이 오로지 제목 하나만 보고.  

  

 비닐에 쌓인 책을 가슴에 품고 집으로 향했다. 책 한 권을 샀지만, 제목 하나로 작은 일탈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 손에는 우산을, 한 손에는 책을 들고 걷는 긴 청바지 속, 두 발이 신나 보였다. 그리고 그 두 발이 15년 전 자취방으로 향하던 ‘나’를 만나게 해 줬다. 미혼이었던 나는 책을 사랑하는 여자였고, 글쓰기를 좋아하던 여자였다. 그때도 긴 청바지를 입고 비 오는 거리 걷기를 좋아했었다. 그 여자가 이제는 자취방이 아닌 아파트로 향하고 있다.     


 아파트 입구에 선 나는, 책을 좋아하고 비 오는 날 홀로 걷길 좋아하던 그 여자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 다음에 또 만나자. 그리고 꼭 행복하자.’


내가 나를 살려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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