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된 첨삭 일을 마무리해서 이메일로 전송해준 시간이 오후 3시, 나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앞치마 질끈 동여매고 첫째가 좋아하는 김치볶음과 미역국을 끓여야 했기 때문이다. 아, 둘째가 좋아하는 짜장밥을 만들기 위해 야채도 다듬어야 했다. 물론 주어진 시간은 1시간 30분! 그러니까 4시 30분까지는 마쳐야 한다. 4시 30분까지 반찬을 만들어놓고 태권도 학원으로 둘째를 데리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태권도 학원에서 둘째를 픽업해 집으로 돌아오면 5시 30분, 오자마자 목욕시켜 옷 입히면 6시다. 이때쯤이면 나의 체력은 거의 방전 상태다. 그래서 단 10분이라도 누워서 쉬어야 한다. 조금라도 쉬어야 저녁밥을 차릴 체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그 타이트한 스케줄을 다 소화해낼 수 있다는 사실, 그것들을 다 해내야 마음이 편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할 때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숨이 가쁘다. 그런데 슬프지 않다. 바쁜데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심지어 보람차다는 생각까지 든다. 왜 그럴까? 나는 왜 바쁜 순간들이 좋을까? 잠시 10분이라도 쉬어야 밥을 차릴 수 있는 체력이 생기는 순간까지도 이 힘듦이 싫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유가 있다. 코로나 초창기, 아이들도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온라인 학습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아이들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척 힘들었다. 그리고 바쁘게 돌아가던 일상들이 무척이나 그리웠더랬다. 아이 하원 시간에 맞춰 가는 것을 힘겨워하던 과거의 나, 친구를 만나다가도 아이 데리러 가야 한다며 나서던 나의 불평들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 순간들이 얼마나 기쁘고 활력 있는 순간들이었는지 몰랐기 때문에 불평했던 것이다.
무기력하다는 것. 그것은 매우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 누군가를 챙겨야 할 일이 전혀 없다는 것, 오로지 나 하나 먹자고 밥을 한다는 것! 어쨌든 그런 것들은 슬픈 것이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나를 귀찮게 하는 그 어떤 불가피한 스케줄들, 일련의 상황들이 나를 좀 더 건강한 방향으로 이끌어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바쁠 때 힘들어 죽겠다는 표현을 종종 하는데, 너무 할 일이 없을 때도 심심해 죽겠다는 표현을 한다. 뭘 해도 죽겠다는 것이다. 이는 유난히 연약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으나, 만족이 없는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만족이 없는 사람이었다. 바쁘면 바빠서 죽겠고, 할 일이 없으면 무기력해서 죽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족하는 삶..... 쉽지 않지만, 나는 이제 자족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 코로나라는 사상 초유의 역병의 시대를 겪으며, 무기력이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알았다. 나는 무기력보다 차라리 바쁜 게 더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바빠져도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바쁜 삶은 나를 무기력으로 슬퍼지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무기력보다는 차라리 바쁜 삶을 지향하는 사람이 나임을 발견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에 대해 뒤로 빼지 않으려 한다.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자신이 없어도 용기를 내보려 한다. 무엇인가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은, 활력 있는 삶을 사는데 꼭 필요한 안전장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주 놀러 가는 블로그가 있다. 그 블로그 주인장의 포스팅에 나는 댓글을 달았다. 포스팅의 내용은 '온라인으로 모여 함께 시나리오 쓰기'였다. 나는 기꺼이 그 모임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댓글도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