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년이 다 된 일이다. 십삼 년 동안 아팠던 아빠가 하늘로 긴 소풍을 떠났다. 아빠는 유전적으로 간이 안 좋았고, 간 경화 진단을 받고 6년쯤 지났을 때 암이 생겼다. 이후에는 병원으로 입·퇴원을 반복하며 생활했다. 끝날 듯 끝나지 않은 기나긴 투병 생활은 코로나가 터진 그해 끝이 났다.
사실 나는 아빠가 가 버렸다는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저 기계적으로 울고 로봇처럼 움직이며 장례를 준비했다. 내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마치 드라마 같고 주어진 임무를 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장녀인 나는 상주노릇을 하며 손님들께 인사를 해야 했고, 일가친척이 다 지켜보는 와중에 맨 앞에 서서 사진을 들고 화장터로 향했다. 아들이 없고 큰 사위가 없어서 여자인 내가 맨 앞에 섰을 때의 그 느낌이란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자격지심일 수도 있지만 쳐다보는 눈빛들이 그 와중에도 ‘불쌍하게’ 느껴졌다. 이 모든 일이 느린 듯 재빠르게 현실감 없이 지나갔다.
그런데 정신없는 와중에 코코는 어떻게 할지 걱정이 되었다. 임종직전에 위태로울 때부터 머리 한쪽에 어떻게 할지 끊임없이 생각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언제 돌아가실지 정확한 시점도 모르는데 호텔링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두자니 사료와 배변처리가 걱정이 되었다. 결국 고민하다 집 근처에 사는 절친한 친구에게 집 열쇠를 주며 장례가 생기면 코코를 하루 한 번만 들여다봐 달라고 부탁했다.
아마 강아지를 저렇게 까지 걱정하는 걸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아빠가 죽어가는 와중에 개 걱정을 하냐고! 그런데 코코는 아빠에게 아들이었고 심리 상담사였고 가장 친한 친구였다. 호스피스 병동에 있었을 때 가장 속상했던 게 강아지를 병원에 데려가지 못하는 거였다. 간혹 해외 사례로 죽어가는 주인을 위해 강아지가 병실에 가서 위로하는 경우가 있던데 우리나라는 왜 그런 게 없나 이해하면서도 답답했다.
아빠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코코의 꼬리털을 잘라 아빠의 뺨에 대주는 것이 전부였다. 내내 반응이 없던 아빠도 그때만큼은 얼굴의 근육을 움직이려 노력하셨다. 코코는 아빠에게 그런 존재다. 그래서 친구에게 집 열쇠를 맡겨가면서까지 챙긴 것이다.
코코는 그저 조용히 지켜봐 주었다.
조용하지만 묵직한 코코의 위로
삼일장을 치르고 집에 온 후 우리 가족은 아빠의 짐부터 정리했다. 장롱을 열고 옷을 싹 꺼내 커다란 쓰레기봉투에 하나둘 넣기 시작했다. 원래 코코는 바닥에 옷가지가 널려 있으면 위로 올라가 철퍼덕 앉는다. 그런데 정리하는 내내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옷이 바닥에 잔뜩 쌓여 있는데도 그저 다가오지 않고, 주변을 맴돌거나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 그저 멀리 가지 않고 짖는 것도 없이 곁을 지켜주었다.
아빠의 짐을 정리하고 삼우제까지 지나고 난 후 어느 날이었다. 혼자 있는데 불쑥 눈물이 나왔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몰랐는데, 막상 보내고 나니 ‘어떤 형태든 숨만 붙어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식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감정이 그제야 밀려왔다. 더는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다는 슬픔이 덮쳤을 때 눈앞에 보이는 코코를 안고 온기와 털을 만지며 애써 스스로를 다잡았다.
코코는 가만히 있었다. 만지는 걸 싫어하는 강아지가 참고 가만히 들어주었다. 웃긴 게 코코를 안고 있으니 서서히 진정이 되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신기한 일은 그 이후에도 일어났다. 원래 코코 산책을 주로 시키는 게 아빠였다. 나나 동생 모두 바빠서 주로 아빠가 데리고 다녔는데 늘 코코의 다리를 걱정하며 안아서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 산책은 이제 우리 차지가 되었다. 코코는 산책을 할 때 한 번씩 뒤에 따라오는 식구들을 확인하고 누군가 늦어지면 기다려준다. 그런데 아빠가 돌아가신 후 식구들이 모두 앞서가고 뒤에 아무도 없는데 고개를 뒤로 돌려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마치 아빠를 찾듯이 몇 번이고 돌아봤다. 그 모습이 어쩐지 짠하고 속상해 코코에게 말했다.
“코코야, 아빠 찾아? 아빠는 저기 하늘나라 갔어.”
하네스를 끌고, 가자고 하면 그때야 발걸음을 옮긴다. 누군가는 그냥 버릇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우리는 코코가 아빠를 찾는 거로 생각한다. 본인을 내내 안아주고 예뻐해 주던 가족이 없기에 그 빈자리를 기억하는 거다.
아빠는 생전에 유언으로 나중에 코코가 죽으면 자신 옆에 묻어 달라고 했다. 그만큼 사랑했고, 아프고 힘든 아빠의 위로가 되었기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다. 그런 코코가 우리 식구도 위로해 주었다. 코코에게 사료 먹여주고 산책시켜 준 것 외에 크게 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충분한 사랑과 신뢰를 받고 있다는 걸 느낀다. 같이 울지 않고 애교도 없는 무뚝뚝한 강아지지만 존재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다. 아마 모든 보호자의 마음이 아닐까.
보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사라지고 어느 순간 슬쩍 옆에서 조용히 위로해 주는 존재로 인해 하루가 행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