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세고 드센 사람만 살아남는다

by 몽상가 J

어른이 되어 소개팅을 하거나 낯선 사람이 있는 모임에 나가면 자연스럽게 각자의 직업을 발표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직업군이 있고, 또 각양각색의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누군가 방송국에서 일을 한다고 하면 모두가 입을 모아 질문한다.


"연예인 정말 많이 보겠어요! 연예인 중에 누가 제일 예뻐요? 실물이 제일 멋있는 연예인은 누구예요?"

"아... 저도 보는 연예인들만 봐요. 그리고 다 예쁘고 멋있어서 누구 하나를 콕 집을 수 없네요, 하하."


나도 그랬다. 14년 전, 방송국에 들어오긴 전에는 좋아하는 연예인도 실컷 보고, 멋지고 화려한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을 버티고 버텨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는 기 세고, 드세고, 악바리 근성으로, 깡으로 일하는 방송작가로 전락해버렸다.






가끔 예능 자막으로 많이 쓰이는 말 중 하나가 '방송국 놈들'이다. 들리는 느낌 그대로 욕이나 다름없는 표현인데, 처음 이 멘트를 들었을 때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적절한 표현이 하나 등장했구나 싶었다. 방송 쪽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 하나 호락호락하지 않기에 조금은 부정적인 느낌도 있지만 나름 짓궂게 포장된 별칭처럼 들려왔다. 방송을 통해 나가는 영상물 하나로 누군가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엄청난 인기를 얻어 인생역전을 이루기도 하는 대단한 파급력이 있는 매체다 보니 방송을 만드는 현장에서만큼은 연예인부터 스태프까지 모두가 다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모두가 악을 쓰고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보니 처음에는 착하고 순박했던 사람들도 몇 년이 지나면 인상이 몰라보게 달라진다.


물론 365일 예민한 상태를 유지하는 건 아니다. 방송국도 사람 사는 곳이기에, 하하호호 웃으며 지내는 평화로운 날들도 분명 존재한다. 한 가지 주제로 12시간 회의를 하기도 하는데 12시간 내내 긴장하며 일을 하는 건 아니고, 헛소리도 했다가 각자의 경험담을 꺼내기도 했다가 꽤 유쾌한 수다 타임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하지만 즐겁게 웃고 즐기다가도 진지 모드로 돌변하는 회의가 시작되면, 거침없이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고 자연스럽게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만만치 않은 방송국 놈들과 일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말빨이 세진 건 사실이다.


예전에 만났던 '가스라이팅남' (헤어진 후 깨달았지만, 1년 넘게 나를 가스라이팅 했던 구남친을 일컫는 표현)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루 종일 회의를 했는데 서로의 의견이 평행선을 그리다가 결론을 내지 못하고 퇴근을 했던 날이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귀가하던 중 '가스라이팅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루 일과를 보고하듯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하다가 피디가 너무 우유부단해서 답답해 미칠 지경이라며 괜히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피디가 결정만 빨리했더라면 오늘 저녁 같이 먹을 수 있었을 텐데.'라는 내용으로 흘러갔고, 서로가 바빠서 꽤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다는 걸 인지하며 언제 만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다가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나도 피곤했고, 그 역시 피곤한 상태로 잠들기 직전에 통화를 했기에 별것도 아닌 일로 언쟁을 벌였는데 갑자기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너희 팀 피디는 진짜 힘들겠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한 마디도 안 지는 너 같은 작가가 10명이나 있으면... 그걸 어떻게 감당하지?"


평소의 나라면 호탕하게 웃어넘겼을 수도 있겠지만 예민함이 극에 달한 상태의 나는 쉬이 넘어가지 못하고 결국 짜증을 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한 마디도 안 지는 너 같은 작가라니! 너랑 나랑 각자의 의견을 얘기하는 건데, 이게 왜 이기고 지는 문제에 속해? 너 괜히 할 말 없으니까 말 돌리는 거지!"


그는 툭 하고 내뱉은 말이었지만 나는 복합적으로 화가 났다. 연인 사이의 문제로 오고 간 실랑이 속에서 이기고 지는 문제가 어디 있으며, 마치 작가들은 모두가 말대꾸를 따박따박한다는 잘못된 판단을 했고, 마지막으로 피디보다 작가들이 드셀 것이라는 잠정적 결론을 내린 그는 유죄였다. 물론 저 대화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내일 통화하자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고, 다음 날 전화를 했을 때는 이미 그 문제를 잊은 뒤였다.


솔직히 모르겠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서로에게 서서히 물들어 가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방송작가들이 모두 기가 세고, 드센 사람들만 모여있는 건 아니다. 물론 '환불 원정대'처럼 할 말을 속으로 삼키지 않고, 누군가에게 쉽게 기죽지 않으며, 어떤 순간에도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이들이 조금 많이 모여있다는 건 인정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나는 확언할 수 있다. 타인 앞에서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기가 세고, 드세다는 표현으로 포장되어서는 안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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