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홈 스윗 홈
예상보다 상태가 좋지 않은 집을 바라보며 한숨이 솟구쳤지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2주일, 정신 차리고 집을 보수해야 했다. 그 당시 '똥물 사건'을 블로그에 썼는데 블로그 이웃 한 분이 글을 읽고 이런 댓글을 남겨주셨다.
아니, 너무도 신선한 발상의 전환이 아닌가!
'그래. 찌든 때에 묻힌 우리 집의 예쁜 모습을 되찾아줘야지.' 그때부터는 집을 보수하는 작업이 힘들고 고된 일이 아니라 우리 집을 구출하는 의미 있는 일로 느껴졌다. 어려울 것도 없지. 7년 동안 8번 이사하면서 오래된 집을 보수하고 쓸고 닦아 '스윗홈'으로 만들어내는 실력을 갈고닦아오지 않았는가.
마음을 다잡고 본격적으로 <우리 집 구출 대작전>에 돌입했다.
썩은 화장실 문과 문틀은 새것으로 교체했다. 타일은 그대로 쓸 예정이라 타일 손상 없이 문틀을 교체할 수 있는 목수님을 수소문한 끝에 금손 목수님을 만났다. 대부분 고개를 저으며 불가능하다고 하는 와중에 그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쾌청한 목소리로 말했다. “됩니다. 맨날 하는 일인데요.”
화장실 실리콘과 줄눈도 새로 했다. 상태가 심각한 바닥 줄눈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상태가 애매한 벽 줄눈은 내가 직접 보수했다.
화장실이 집에 비해 작은 편이라 앙증맞은 사이즈의 변기와 세면기를 설치했고 마치 기내용 화장실처럼 귀여운 화장실로 재탄생했다.
주방 후드와 싱크볼의 찌든 때와 녹 역시 며칠 동안 불려서 닦아내도 지워지지 않아서 새 걸로 교체했다.
온 집안의 문과 문틀을 두르고 있던 누런 스펀지는 스티커 제거제로 녹여서 긁어내고 8년 간의 손때가 묻은 집안 곳곳을 페인트로 덮었다.
짙은 네이비색 시트지도 따뜻한 화이트 색으로 칠했다.
발품 팔아 저렴한 가격에 도배지를 계약했고 감사하게도 훌륭한 도배사를 만나서 지금까지 경험해 본 도배 작업 중 가장 결과가 좋았다.
그레이색 벽지와 네이비색 시트지 때문에 덩달아 어두침침해 보였던 나무 바닥도 벽지를 바꾸고 나니 고급스럽게 톤 다운된 나무 바닥으로 거듭났다.
8년이 흘러 제각각의 색으로 얼룩덜룩해진 LED 조명도 한 톤으로 깔끔하게 맞췄다. 옛날 스타일의 유리 조명틀도 바꾸고 싶었지만 천장 매입등이라서 내부의 LED 패널만 갈아 끼웠다. 조명 톤을 맞추고 먼지가 소복했던 유리를 깨끗하게 닦아냈을 뿐인데도 촌스러움이 싹 가셨다.
마지막으로 입주청소까지 하고 나니 올수리 한 새집이나 다름없었다. 입주청소 해주시는 분들이 창문에 붙은 강력스티커와 뽁뽁이를 흔적 없이 깔끔하게 제거해 주셨다. 입주청소에 무려 10시간이 걸렸다.
우리가 직접 한 건 별거 없고 기술자분들의 힘을 빌렸는데도 집을 수리하는 동안 온몸을 두드려 맞은 듯 아팠다. 초보 페인트공인 우리는 머리카락과 옷에 흰색 페인트를 잔뜩 묻힌 채로 늦은 밤 삼겹살 집에서 기술자 분들의 위대함을 칭송하며 맥주를 들이켰다. 노동 후에 먹는 삼겹살과 맥주는 진정 꿀맛이었다.
수리 범위를 최소화하되 할 건 다 했다. 특히 화장실과 주방은 매일 사용하는 곳이고 물을 써야 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비용이 들더라도 깔끔하게 수리했다. 수리 비용은 이사와 입주청소까지 합쳐서 약 700만 원 정도 들었다.
6년 만에 다시 집을 만났을 때는 '이 집에 살 수 있을까?'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의 손길을 거쳐 집 본연의 아늑한 느낌을 되찾았다.
무사히 이사하고 남편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우리 집 예찬론을 펼치고 있다.
천연덕스럽게 묻는 남편 등을 툭 치며 나는 한술 더 뜬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30년 넘은 아파트, 녹물과 주차난은 기본이요, 신축 아파트의 커뮤니티 시설 같은 건 꿈도 못 꾸지만 충분히 만족스럽다.
01 방이 3개
"여보 방이 3개야 3개!" 원룸에도 살아보고 1.5룸, 2룸에도 살아봤는데 이번에는 무려 쓰리룸이다. 그래봤자 20평의 자그마한 집인데도 집이 너무 커서 무전기가 필요한 거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며 지내고 있다.
02 계단식 아파트
복도식 아파트에 살 때는 아침에 환기시키기 위해 열 창문이라고는 베란다 샷시 하나뿐이었다. 집 전체를 환기하기 위해 맞바람을 치게 하려면 현관문을 열어야 했다. 복도 쪽 방의 창문을 열면 아파트 공용 복도이기 때문에 가림막을 세워놓아야 했다. 물론 한 여름에 모기장을 설치하고 현관문을 활짝 열어 놓았을 때의 즐거움이 있었다. 시골집 혹은 캠핑 온 것 같은 날 것의 느낌이랄까.
지금 집은 계단식 아파트라서 창문을 열면 복도가 아니라 밖이다. 매일 아침 창문을 열며 마주하는 초록빛 나무들을 바라보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현관문을 열지 않아도 집 안을 골고루 환기시킬 수 있다. 늘 계단식 아파트에만 살았다면 당연하게 여겼겠지만, 우리에게는 신기한 풍경이라 매일 창문을 열 때마다 감사함을 느낀다.
03 공원까지 걸어서 3분 거리
가족들이 놀러 올 때마다 제일 먼저 자랑하는 건 공원이다. 공원까지 걸어서 3분 거리라서 그냥 공원 안에서 살고 있는 느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동네는 아이들이 찻길을 건너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어서 어린아이를 키우는 가족에게 인기가 많은데 나도 찻길을 건너지 않고 푸르른 나무 사이로 걸어 다닐 때마다 기분이 좋다.
6년 전 처음 집을 만났을 때도 안전 기지 같은 느낌, 새의 둥지 같은 아늑한 느낌이 좋았다. 직접 살아보니 처음 느낌 그대로 참 포근하다.
04 층간소음
물론 아파트이기에 층간소음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아랫집 TV소리가 벽을 타고 올라오는데 우리 집에는 TV가 없어서 유독 크게 들린다. 윗집의 쿵쿵 거리는 발소리도 없지 않다. 아침 6시에 윗집 혹은 윗윗집의 강아지가 1시간 동안 짖어대기도 한다. 이른 아침부터 경비아저씨들이 경비실 앞에서 목청 높여 대화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기도 한다.
하지만 내 기준에는 층간소음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12평 복도식 아파트에 살 때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대각선의 어디쯤에서 이웃이 샤워하며 노래하는 소리,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으며 살았다. 제주 7평 원룸에서는 매일 밤 윗집 주인집 화장실에서 바닥에 빨랫감을 비비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신림동 원룸은 건물 벽이 종이처럼 얇아 집 안과 밖의 경계가 애매했다. 오르막을 달리는 배달 오토바이 소리에 기겁하며 놀라 잠에서 깨기 일쑤였다. 바로 이전에 살았던 월세집에서는 윗집에 미취학 남자아이 둘이 있었는데 층간소음의 끝판왕이었다. 2년 동안 인간으로서의 인내심을 테스트받는 기분이었다.
05 액자를 걸 자유
우리 집에 살면 좋은 점은 역시 액자를 마음껏 걸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액자 안 걸면 그만이지 액자가 뭐 대수라고' 할 수 있지만, 액자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 눈치 볼 사람 없이 복구할 걱정 없이 집에 내 취향을 마음껏 묻힐 수 있다는 의미이다.
남의 집에는 액자를 걸지도 못했고 자가에 살면서도 언제 이사 갈지 모르는 임시 집이라는 생각에 액자를 걸기가 망설여졌다. 액자에 끼우면 부피가 커지니 마음에 드는 그림을 사놓고도 서랍 속에 넣어두기만 했다. 이사 오고 드디어 몇 년 동안 고이고이 모아 온 그림들을 모두 액자에 넣었다. 그림을 꼭 맞는 액자에 넣을 때의 짜릿함, 이거야 말로 소소하고 확실한 기쁨이다.
집의 장점이야 나열하기 나름이지만,
나의 세상은 내 마음의 반영이라고 하지 않는가. 내 마음이 좋으면 구린 것도 좋게 보이고 내 마음이 구리면 좋은 것도 구리게 보인다. 지난 7년 간 9번 이사하며 내가 얻은 건 우리가 살 집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마음의 능력이 아닐까. 작은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능력, 어려움을 겪어도 회복하는 능력은 쉬운 경로로 왔다면 얻지 못했을 귀한 능력들이다.
결혼하고 자주 쓰는 말 3종 세트가 있다. '덕분에, 그럼에도, 감사하다.' 이 3종 세트는 꼭 시련과 함께 다니는 듯하다. 그리고 시련은 반드시 좋은 운을 꼬리에 달고 온다. 특히 귀인운. 우리가 이 집으로 오기까지 스쳐온 많은 귀한 인연들을 떠올리면 그저 감사하다.
그동안의 날들이 까마득하다. 고생 끝, 고생 시작이 반복되던 나날을 거쳐 결국 아늑하고 아담한 우리 집에 둥지를 틀었다. 여기가 우리의 마지막 집은 아니겠지만, 처음으로 이사 갈 걱정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7년 만에 처음으로 마음이 탁 놓아진다. 세계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느낌이랄까. (세계여행은 해본 적 없지만....) 유랑자로 살다가 잠시 방랑을 멈추고 집에 돌아온 것만 같다. 이어령 선생님 말씀처럼 돌아올 집이 있었기에 기꺼이 방랑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